스펜서

스펜서

코로나 시국 내내 집에서 영화를 보다가 거의 2년만에 영화관에서 영화를 본 듯.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쪽이 시간이 맞아서 고민하다가 “스펜서”를 보았는데 기대 이상으로 훌륭한 영화여서 기뻤다.

“스펜서”는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별거를 시작한 무렵의(1991년) 이야기다. “더 크라운” 4기 마지막 부분의, 샌드링엄 하우스에서의 크리스마스 휴가 부분이 이 영화에서 다루는 기간이다. “더 크라운”에서는 이 대목에서, 찰스는 카밀라에게 의지하며 자신이나 카밀라보다 사랑받는 다이애나를 질투하고 증오하며, 다이애나의 성과들을 깎아내린다. 여왕은 강아지들에게 먹이를 줘야 한다며 다이애나와의 대화를 회피하고, 찰스는 이제 불륜을 숨기지도 않는다. 유일하게 다이애나에게 다정하게 대한 인물은 필립 공이지만, “더 크라운”의 이 에피소드에서 다이애나는 마침내 찰스와 헤어질 수 밖에 없다고 필립 공에게 말한다. (이 드라마에서 필립 공은 자신도 결혼을 통해 왕족이 된 인물로서 스스로를 어느정도 아웃사이더라 여기고 있다) 같은 시기다 보니 영화와 드라마의 이 대목이 비교가 된다.

영화는 그야말로 고딕 호러처럼 느껴진다. 현실에서 연주되는 클래식 실내악은 다이애나의 머릿속 방황이 오버랩되며 재즈 풍의 불협화음을 일으킨다. 카메라는 때로 불안하게 흔들리고, 불편한 각도로 공간을 비춘다. 우울증으로 혼란에 빠진 다이애나는 자신을 찾으러 온 여관에게서 자신의 의상 담당자인 매기의 모습을 보지만, 그것은 환상이다. 여관의 실제 모습은 거울에 비치고 있다. 고딕 호러의 집사같은 그레고리 소령은 마치 샌드링엄 하우스 곳곳에 눈과 귀가 있는 것 처럼 모든 것을 알고 있고 어디서나 나타나며, “재미”라는 이유로 다이애나에게 불쾌한 관습(크리스마스 전후의 체중을 재서 얼마나 늘었는지 알릴 것)을 따를 것을 요구한다. 사흘동안의 왕실 크리스마스 휴가 동안, 다이애나의 일정은 식사와 파티, 사냥과 같은 화려한 왕실의 일들로 채워져 있지만, 다이애나에게 이 모든 일들은 자해를 할 만큼 고통스럽다. 찰스와 그레고리 소령은 파파라치가 나타난다는 이유로 다이애나의 방 커튼을 꿰매버리고, 이곳에서 유일하게 말 상대가 되는 의상 담당자 매기를 내쫓아버린다. 다이애나는 불행하고 불길하게 홀로 남겨진 채, 길을 잃은 비극의 주인공처럼 행동한다. 포스터에서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채 비탄에 빠져 있는 다이애나의 모습은, 사실은 거식증에 걸려 변기를 끌어안고 고통스럽게 토하는 모습이다. 그는 영화의 중반까지 계속, 죽음에 닿아 있고, “빅토리아 여왕”과 “앤 불린”으로 상징되는 샌드링엄과 자신의 생가 주변을 유령처럼 떠돈다.

과거 빅토리아 여왕이 머물렀다는 샌드링엄에서 다이애나는 빅토리아 여왕의 각질도 여기 남아 있을 거라는 말을 한다. 그는 앨버트 공이 죽고 평생 상복을 입고 살았던 빅토리아 여왕의, (배신하지 않는) 사랑에 대해 말하지만, 현실에서 다이애나의 사랑은 배신당했다. 왕실은 다이애나에게 빅토리아 여왕 같은 정숙함을 요구하지만, 다이애나의 현실은 스펜서 가문의 먼 조상과 혈연이 있는 앤 불린에 가깝다. 그리고 샌드링엄 하우스와, 그 곁에 있는 다이애나의 생가에서, 다이애나는 계속 앤 불린의 환상을 본다. 앤 불린은 헨리 8세를 사랑했지만, 헨리 8세의 사랑은 앤 불린을 떠나 그의 시녀인 제인 시모어에게 쏠린다. 그리고 제인 시모어와 결혼하기 위해 앤 불린을 처형한다. 친동생과의 불륜의 죄를 씌워서. 카밀라와 다이애나에게 같은 진주목걸이를 선물한 찰스의 무신경함은, 앤 불린과 제인 시모어에게 같은 초상화 목걸이를 선물한 헨리 8세의 잔인함과 겹쳐진다. 다이애나는 아들인 윌리엄, 해리와 함께 진실 게임(소령과 병사 게임)을 하며 위로받지만, 이때 다이애나는 자신의 불행을 “과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과거는 크리스마스 예배를 보고 나오는 장면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 장면에서 찰스 너머에 서 있는 카밀라를 보고, 다이애나는 “제인 시모어”라고 말한다. 다이애나의 의식은 목이 잘리기 직전의 앤 불린과 고통스럽게 겹쳐진다. 결국 그는 철사로 묶여 있고, 계단이 다 썩어 부서진 자신의 생가로 숨어 들어간다.

소극적이고 무엇하나 잘하는 게 없었다는, 부모님의 일로 상처받았던 어린 소녀였던 자신을 보고 눈물을 흘리던 다이애나는 삭아가는 계단에서 사고처럼 자살하려 한다. 그 죽음을 만류하는 이는 바로 앤 불린이다. 그의 고통을 듣고, 다이애나는 죽음을 택하는 대신 찰스의 선물인 진주 목걸이를 끊어버린다. 그 장면에서 다이애나의, 소녀 때 부터 어른이 된 뒤 까지의 모습들이 겹쳐진다. 그 다이애나가 달리고, 자전거를 타고, 다시 어른이 되어서 달려서 이 샌드링엄을 벗어나는 환상들은, 처음에 경호원이나 비서에게 운전을 시키지 않고 혼자서 차를 몰고 길을 헤매며 샌드링엄까지 왔던 다이애나의 모습의 연장선이다. 그에게는 달아날 힘이 남아 있다. 그리고 이 진주목걸이를 끊어버린 이후, 앤 불린의 환상은 더는 나타나지 않는다. 우울증으로 자살 삽화가 나타나는 사람에게, 이 현실을 견디라고 하는 것은 죽으라고 하는 말과 같다. 앤 불린은 다이애나에게 이곳을 떠나고 살아날 것을 말해주고 사라진다. 다이애나가 스스로 찾은 답과도 같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다이애나는 샌드링엄으로 오던 길에, 과거 자신의 생가 근처에서 자신의 아버지, 스펜서 백작이 입었던 낡은 붉은 코트를 입고 있는 허수아비를 발견한다. 붉은 색은 스펜서 가문의 문장에 들어가 있는 색이다. 이 코트는 처음에는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이었고, 이야기의 결말에서 남편에게서 벗어나 자신의 본래 이름(뿌리)을 찾고 도망치는 다이애나의 새로운 상징이 된다. 다이애나는 마지막에 아들들과 함께 차를 몰아 런던으로 도망칠 때 이 옷을 입고, KFC의 드라이브스루 매장에서 자신의 이름을 “스펜서”라고 댄다. 하지만 낡은 코트를 지금 입으려면 수선이 필요하다. 아버지의 추억도 그대로 걸친다면 몸에 맞지 않는 옷일 뿐이다. 이 과거를 수선해 현재로 만들어주는 인물이 바로 의상 담당자인 매기다. 매기는 다이애나에게 오랫동안 사랑해 왔다고 고백하며, 다이애나에게 필요한 것은 병원이 아니라 충격, 웃음, 그리고 애정이라고 말한다. (사실 이 장면에서 실제 역사와 달리 다이애나와 매기가 손 잡고 도망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이애나는 그 조언을 따른다. 그는 총을 쏘는 것도, 새를 죽이는 것도 싫지만 찰스의 강권으로 사냥터에 끌려간 두 아들을 데리고 도망치고, 런던으로 가는 내내 노래를 부른다. 다이애나가 실제로 이혼을 관철하는 것은 그 뒤로 몇 년이 더 지난 뒤의 일이며, 이후 다이애나는 사고로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 서글프다. 왕실 가족들이 보내는 크리스마스의 호화로움과 그것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보며 군주제에 대한 비판이 떠오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다이애나의 예정된 비극이나 왕실에 대한 비판과는 각도를 달리하며, 불화와 마음의 고통으로 격심한 우울증을 앓으며 자살 삽화를 보이던 여성이 어떻게 자신의 원래 이름을 되찾고, 생(生)을 찾아 달려나가는지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