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님이 보고 계셔 – 콘노 오유키, 제이노블

마리아님이 보고 계셔

“마리아님이 보고 계셔”가 연재되기 시작한 것은 1997년, 완결은 2012년. 작중에서도 메이지 이후 연호가 세 차례 바뀐(메이지-다이쇼-쇼와-헤이세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말하는 이 소설을 레이와 시대에 사극 보는 기분으로 다시 읽었다. 비교적 현대이지만 스마트폰이 없던 시대의 이야기다 보니 신선하게 다가오는 부분들도 있다. 마치 “응답하라 XXXX년”처럼. 라이트노벨로는 매우 긴 분량인 37권이나 되지만 요약하면 평범한 1학년생 후쿠자와 유미가 로사 키넨시스 앙 부통이자 오가사와라 재벌가의 손녀인 오가사와라 사치코에게 로사리오를 받고 쇠르가 되면서 시작되어, 사치코가 졸업할 때 까지의 약 1년 반 동안의 이야기다. 실제로 내용이 진행되는 부분만 보면 전체 분량의 반 정도. 나머지는 앞서 일어난 사건들을 다른 각도로 계속 돌려보는 회상씬이나, 릴리안을 배경으로 하는 단편 외전들이다.

사실 과거에 이 시리즈를 읽다가 “로사 카니나” 대목에서 진저리가 나서 소설로는 읽기를 그만두었다. 그래도 이 장르의 고전 까지는 아니라도, 백합 장르를 일반인에게도 널리 알린(“타이가 비뚤어졌어” 밈이라든가.) 작품이다 보니 애니메이션으로는 한번 끝까지 보긴 했지만 역시 그 부분이 매우 거슬렸다. 그때에도 얘들은 선거를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싶었다. 지금 요약하면 한번 입학하면 대학까지 에스컬레이터로 쭉 올라가는 명문고 고등학생인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인맥을 형성하고(쇠르 관계) 그 인맥에 따라 학생회장이 되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적폐 세습이 아닌가. 물론 사립학교, 또는 사립기숙학교라는 작고 닫혀있는 세계, 선생님들보다 큰 권위를 휘두르는 학생회 또는 주인공, 학생회를 동경하는 아이들 등은 수많은 소설, 만화, 애니메이션 등의 배경이었다. 하다못해 어릴 때 읽었던 에니드 블라이튼의 “말괄량이 쌍둥이” 시리즈나 “신입생 다렐르” 시리즈부터 “해리 포터”, 어린이용이 아닌 것으로 그런 사립학교 배경의 비슷한 것으로는 “젠틀맨 & 플레이어”도 있었다. 결론만 말하면 에니드 블라이튼도, 조안 해리스도, 조앤 롤링도 모두 영국 작가들이다. 일본쪽 작품으로는 당장 제목에 “학생회”로 검색하면 나오는 작품만도 한 손에 꼽지 못할 것이요, “디어 브라더”도 “꽃보다 남자”도 “소녀 혁명 우테나”도, 이 “마리아님이 보고 계셔”도 그렇지만 제목에 그런 말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뛰어나고 멋진 사람들이 다니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평범한 내가 그 빛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식의 이야기를 다 꼽는다면 책 한 권을 써도 모자랄 것이다. 그렇다, 일본이다. 영국과 일본, 왕정이 남아 있고, 신분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무엇보다도 그런 사립학교들이 정말 있다. 에스컬레이터식으로 진학하는 명문학교에 입학시키려고 높은 경쟁률과 비싼 학비를 감내하며 유치원 입학시험을 치른다는 일본의 이야기나, 여전히 명문으로 꼽히는 이튼, 해로우 같은 영국의 명문고 이야기들 말이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만화나 라이트노벨에서 폐쇄적인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이 없진 않다. “개와 공주”처럼 왕정이 복고된 가상의 한국이든가, “세인트 마리”나 “열왕대전기”, “Ciel” 처럼 세계의 운명을 건 SF/판타지에서 종종 쓰인다.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의 배경으로 이런 사립학교들이 쓰이는 일은 많지 않다. 이런 장르는 결국, 종말을 앞둔 세계, 알을 깨고 나가야 하는 세계를 그리는 판타지나 SF 세계에서의 사고실험이든가, 왕이 남아 있고 계층이동의 사다리가 극히 제한된 신분제 사회의 욕망을 담은 것일까 생각하게 된다. 아마도 이 작가님은 그냥, 다양한 소녀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그럼에도, 민주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독자에게 이 소설은 읽으면서 걸리는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원작에서 사치코가 햄버거를 손으로 들고 먹을 줄 몰라 쩔쩔 매는 모습에서 한국인은 물만 제 손으로 떠 마셔도 칭찬받던 박근혜를 떠올릴 수 밖에 없다. (혹자는 사치코를 나경원 의원에 비유하기도 했다.) 아, 그래. 사치코 사마는 자민당 찍었을 거고 아마 오가사와라 회장은 자민당에 정치자금도 대고 있겠지. 다들 양가집 아가씨이지만 사치코를 제외하면 대체로 평범한 듯 묘사되긴 해도, 이 이야기 속 인물 중 상당수는 어머니도 릴리안을 졸업했고, 현역 ‘장미님들’을 동경한다. (유미도 그렇다. 유미의 어머니는 과거 사치코의 어머니인 사야코와 인연이 있었다.) 대부분의 인물들은 평범한 회사원 가정의 딸이 아니라 사립학교 학비를 감당할 만한 중산층 집안의 딸이다. 유미의 아버지도 설계사무소 대표이고, 유미가 사는 집은 “산백합회와 하나데라 학생회가 전부 들어올 만큼” 작지 않은 3층집이다. 다른 친구들도 대체로 그렇다. 그리고 이런 양가집 출신 소녀들이 모여있는 릴리안에서, 권력은 철저히 세습된다. ‘장미님들’은 우아하고 겸손한 학생처럼 보이지민 실질적으로 학교 안에서 학생이 자치하는 부분에서는 교사 이상의 권위를 갖는다. 학생회 선거는 장미님들의 쇠르인 “부통”들이 입후보하고, 이들이 그대로 다음 “장미님들”이자 학생회가 된다. 그리고 이 학생회 선거에 입후보하는 다른 학생은, 갑자기 튀어나온 못이자 和를 깨는 존재가 된다. 로사 카니나 대목도 그렇고, 장차 유미의 쇠르가 될 마츠다이라 토코가 학생회 임원 선거에 입후보하는 대목도 그렇다. 그리고 여기서 로사 페티타인 요시노는 대놓고 말한다. 세습이 뭐가 나쁘냐고. 야, 선거가 장난이니? 새벽 세시까지 투표방송 보는 한국인은 환장하며 이북 리더기를 집어던지게 되는 대목이다.

에스컬레이터 식으로 릴리안 여대에 진학할 예정이다 보니, 이들은 외부 학교 입시를 치르는 몇몇을 제외하면 필사적으로 공부하지도 않는다. 사치코는 재색겸비한 모범생이지만, 사치코가 공부하는 것을 친구들이 목격한 것은 그가 운전면허 시험을 준비했을 때 뿐, 평소에 사치코는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 남자 그 여자(카레카노)”에서도 유키노는 학교에서 애써 공부하는 척을 하지 않다가 집에 와서 죽자사자 공부하고, 아리마의 고모도 젊었을 때, 얼굴에 화장수를 묻힌 팩을 잔뜩 붙인 채 밤 늦게까지 공부하며 필사적으로 공부하는 티를 내고 싶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릴리안 여대는 명문이고, 릴리안을 졸업한 여학생은 좋은 신붓감이 된다. 아마도 하나데라같은 남학교라면 그렇게 학생회 활동 하던 겐지/헤이시 파벌이나 에보시 관계끼리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며 취업이나 승진 인맥이 되겠지…… 생각하면 읽으면서 마구 혈압이 오르는 효과도 있다.

물론 남성 작가가 여고생을 상상하며 쓰는 것과 달리, “마리아님이 보고계셔”의 인물들은 나름 생생하다. 동경도, 감정도, 여학교에서 여학생들만 모아놓았을 때 특유의 과격함도(이건 남성 작가는 쓰지 않는다) 조금은 있다. 아주 별 것 아닌 것 같은데 그 나이의 소녀에게는 중요한 것들을 꽤 다루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은 20년 전에 연재가 시작된 “사극”이다. 하지만 “어린 양들”과 “마리아님”으로 상징되는 순결한 이상향 안에 이들을 밀어넣으니, 이들의 상처나 갈등은 종종 너무 쉽게 봉합되어 버린다. 오가사와라 회장님은 좋은 신사처럼 보이지만 부인을 두고 바람피우는 남자고, 오가사와라 가문 남자들이 설 다음날 애인들을 만나러 사라지는 것도 좋게 미화된다. 또 카나코의 이야기가 그렇다. 스포츠 지도자인 카나코의 부친은 이혼 전, 카나코보다 두세 살 연상인 학교 선배이자 재능있는 운동선수였던 미성년자를 임신시킨 뒤, 이혼하고 이 미성년자와 결혼한다. 카나코는 그런 부친의 행동에 질려 남성혐오가 된다. 부친과 선배는(결혼은 가능하지만 아직 미성년자) 갓난아기인 동생을 안고 학교 축제에 찾아온다. 이게 용서가 될 일인가……? 다른 것 다 떠나서, 자기가 지도하던 미성년자를 임신시킨 스포츠 지도자인데? 그런데도 용서를 하는 것을 보고, 아주 질려버렸다. 그럼에도 어떤 시기에 중요하게 주목받을 만한 작품이고, 특히 백합장르가 초 마이너에서 조금씩 물 위로 떠오르는 지금은 역사적인 가치가 있을 것 같아서 끝까지 읽었는데, 끝까지 대략 그러하다. 아마 15년 전에 “로사 카니나” 에피소드에서 던져버리지 않고 계속 읽었어도 저 대목에서 치를 떨었을 것 같긴 하다.

어쨌든 오가사와라 회장은 자민당이랑 정경유착 할 거고, 여기 나오는 애들은(세습이 뭐가 나쁘냐는 장미들을 포함해서) 대부분 평생 자민당이나 찍겠지. (한숨) 학교 다닐 때 쇠르와의 관계는 미래의 연애와 결혼을 위한 연습이 되고, 결혼하면 아이를 낳아서 릴리안에 보내거나, 아니면 학교 관계자가 되어 다시 릴리안에서 교사가 되거나 할 것이다. (현재 릴리안의 교사나 관계자 중에도 릴리안 졸업생이 많다) 그들의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세계는 그렇게 계속될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 매우 갑갑하지만, 서른 일곱 권을 다 읽은 감상은 그렇다. 언니에게 로사리오를 돌려주며 자매의 인연을 끊는 것 따위를 혁명이라고 부르지 말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