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즙 배달원 강정민 – 김현진, 한겨레출판

녹즙 배달원 강정민
녹즙 배달원 강정민
녹즙 배달원 강정민

김현진 작가님이 보내주신 신간 “녹즙배달원 강정민”을 점심시간마다 사흘에 걸쳐서 읽었다. 웹툰 작가를 꿈꾸던 강정민은 게임 회사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취업하지만, 회사 내 만연한 성추행의 끝에 팀장의 머리를 술병으로 후려치고 회사를 때려치운다. 회사에 다니면서 모아 둔 돈은 엄마가 오빠 결혼시키는 데 전부 털어 썼고, 게임 회사에서 팔리는 꼴리는 그림체가 손에 익어버려 당장은 웹툰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정민은 알코올에 의존하는 한편 새벽마다 녹즙을 배달한다.

아침 음료수 배달은 “손에 물 묻힌” 사람들, 경력이 단절되고, 고된 가사노동에 시달리는 “아줌마들”의 세계이자, 부조리가 난무하는 세계다. 정민은 자신의 고객들을 빼가면서 자신이 녹즙 배달할 때 쓰는 아이스팩을 가져가다 못해 자신의 동료들에게도 가져다 주는 야쿠르트 여사님이나, 녹즙 수레를 고물상에 갖다버리며 소위 ‘인사’를, 공짜 녹즙을 요구하는 경비, 그리고 여동생 같아서 걱정되어서 그렇다면서 차라리 토킹바에서 일하라고 권하거나 따로 만날 것을 요구하는 남성 고객님들을 상대해야 한다. 이 녹즙 배달 업계에서 삼십 대의 비혼여성이자 취업준비를 계속하는 정민은 이질적인 존재이지만, 정민에게도 녹즙 배달 업계는 ‘이상한 나라’다. 처음 정민이 녹즙 배달을 시작할 때 지사장은 어드밴티지와 어드벤처를 헛갈렸지만, 결과적으로 이 이야기는 “이상한 나라의 강정민”이 겪는 매우 현실적인 모험이기도 하다.

이 이상한 나라를 모험하는 강정민을 지탱하는 인물이 술 친구인 민주다. 민주의 부모는 운동권 출신이었지만, 그들은 딸인 민주와 아들인 민중을 동등히 대하지 못하고, 민주를 착취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런 민주에게 있어 인생의 지향점은, 중학교 때의 선생님이었던 창희다. 제자들을 성추행하던 남교사에 맞서던 창희는 진정한 사랑과 평등을 안겨줄 것 같은 상대를 따라 인도로 떠났고, 민주는 언젠가 창희를 다시 만날 날을 꿈꾸며 돈을 모으고 힌디 어를 공부한다. 그리고 정민의 녹즙값을 1년동안 떼어먹은 F씨가 이직한 회사 앞에서 일인시위를 하여 녹즙값을 돌려받게 해 준다. 그렇게 정민의 현실을 지탱하던 민주는 몇 번 데이트한 남자에게서 폭력과 불법촬영 협박에 시달린다. 정민은 그 남자를 역으로 협박해 영영 쫓아내지만, 민주는 정민의 세계에서 떠나 인도로 가고, 그곳에서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여성들을 돕게 된다. 하지만 민주는 정민의 세계에서 영영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 증거로 민주는 어느 유튜버와의 인터뷰에서 정민을 호명한다. 마치 시련을 넘고 정신적 스승을 고통에서 구해내며 다음 단계로 나아간 민주가, 다시 정민에게 손을 내밀어 정민의 의식을 고양시키려는 듯이. 민주는 정민의 현실적인 면을 지탱하고 이끄는 스승이다.

한편 이 이상한 나라에서 정민에게 의지가 되는 인물이 한 명 더 있다. 민주의 힌디 어 공부 모임 뒤풀이에서 만났던 최준희다. 그는 정민에게 술을 마시자고 꼬드기지도, 술에 취한 여성을 모텔로 끌고가 쾌락의 도구로 삼지도 않고, 정민이 필요할 때 나타나는 인물이다. 그는 정민이 다니는 정신과 폐쇄병동의 “최 보호사”라고 자신을 소개하는데, 이 “최 보호사”는 “저승사자”라 불리는 인물이다. 보호사인 그는 정민을 care하는 사람이고, 수호자 guardian 이기도 하다. 그는 마치 제제의 뽀르뚜가가 제제의 환상을 투영한 인물인 것과 같이, 정민이 병동의 최 보호사에게 환상을 투여한 인물이자, 정민 자신이기도 하다. 정민이 술을 모두 갖다 버리고, 잊고 있었던 웹툰 작가의 꿈을 다시 떠올렸을 때, 그의 정신적인 보호자이자 수호천사는 현실에서 사라진다.

(읽으면서 최준희는 “술”이자 삼신할머니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삼신은 성장하는 아이의 수호자인 이승삼신과, 아이를 저승으로 데려가는 죽음의 신인 저승삼신으로 나누어 보기도 한다. “술”은 상처받은 강정민의 영혼을 보듬어 주지만, 한편으로는 그를 파멸로 이끌고 있다. 최준희는 그를 경고하고, 하수구로 쏟아진 술과 함께 사라진 것이다.)

정민은 녹즙 배달원 생활을 그만두고, 잃어버렸던 꿈을 찾아 앞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이 이야기 속의 다른 배달원들, 그리고 현실 속의 배달원들은, 그렇게 배달 일을 일시적인 통과의례로 지나쳐 갈 수 없다. 읽는 내내 행간마다, 하루 걸러 윌을 마시고 예의바르게 인사를 하고 때때로 안부를 묻지만, 바쁠 때는 의식하지 못하는 때도 있는 야쿠르트 여사님을, 알라딘 상자를 들고 올라오시는 택배 기사님을 생각했다. 예의바르게 인사를 하고 있고 때로는 더운 날 사무실 냉장고에 들어있던 아이스팩을 쥐여드려도, 여전히 내가 생각하지 못하는 수많은 것들이 있다. 노동 이전에 현실에 놓인 수많은 부조리들, 구조화된 착취. 작가가 그런 현실을 경험하고 이해하여 쓴 책이라서, 나는 읽는 내내 여기저기 찔렸다. 내가 누군가의, 컴퓨터를 멀쩡히 돌아가게 하고 업무용 시스템들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배경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닌 것 처럼 그분들 역시 NPC도 배경도 아니다. 그걸 머리로 알면서도 바쁘게 돌아가다 보면 가끔은 그 사실을 생각하지 않게 된다. 내 그런 오만과 무지를 생각한다. 읽다가 제일 오래 들여다 보았던, 녹즙이나 야쿠르트를 마시면서 생각해보지 못했던 문장 하나를 다시 떠올린다.

“녹즙 배달이란 그 달의 녹즙값이 1원의 오차 없이 수금되어야 수당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 때문에 비용을 연체하는 고객이 있으면 그 달 치 노동의 대가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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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on Hey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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