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피아노 Play It Again – 앨런 러스브리저,이석호 역, 포노(PHONO)

다시, 피아노
다시, 피아노

“가디언”의 편집장 앨런 러스브리저는 어릴 때 피아노와 클라리넷을 배웠다. 그는 중년이 되어서야 다시 음악을 시작한 것 처럼 말하지만, 사실 젊었을 때에도 월셋집에 작은 업라이트 피아노를 두고 있었고, 잠시 처분했다가도 두 딸이 태어난 뒤에 다시 피아노를 장만했다. 비록 칠 수 있는 레파토리가 확 줄어들고, 가디언의 기자로서 바쁘게 살아왔지만, 음악을 아주 놓아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회적인 성공을 거두면서도 중년을 맞아 다시 기분을 전환하고 몰입할 것을 찾기 위해 피아노 레슨을 받던 그는, 피아노 워크숍에서 자신과 마찬가지로 아마추어인 게리가 쇼팽의 발라드 1번 G단조를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도 1년동안 같은 곡을 연습해서 내년 이 워크숍에서 연주하겠다,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한 마디로 “쟤가 나보다 썩 나아보이지도 않는데 저런 곡을 칠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어.”같은 질투심의 발로다. 러스브리저는 그 목표를 주변에 알리고, 본격적으로 발라드 1번 연습을 시작한다.

책 뒷표지에 언급된 바와 같이 그 해는 위키리크스 사건에다 일본의 동북부 대지진, 그리고 아랍의 봄 사건이 일어난 해였다. 게다가 루퍼트 머독이 이끄는 뉴스 인터내셔널의 자회사이자 더 선(The Sun)의 일요판인 뉴스 오브 더 월드가 유명 연예인이나 테러 사망자 가족의 휴대전화를 도청하거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숨진 병사들, 그리고 13세 소녀가 납치되어 살해당할 때 그 가족과 친구들의 음성 메시지를 해킹하여 확보하는 등 광범위한 전화 도청 및 감청, 해킹 사건을 벌인 것을 가디언의 기사로 폭로해낸 해이기도 했다. (이 도감청 스캔들 자체는 국내에서 아주 자세히 보도하진 않았는데, 예전에 영국 정치 덕질하시는 계정에서 레베카 브룩스와 루퍼트 머독 사진을 올리며 자세히 이야기하신 적이 있었다.) 이런 해가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그런 공약을 하고, 피아노 연습을 시작하다니. 그야말로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린 셈이다.

중년의 위기를 악기 레슨으로 극복한다거나, 나보다 잘하지 못하는 것 같았던 주변 인물이 어려운 곡을 연주하는 것을 보고 “나도 할 거야!”하고 목표를 세운다거나,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은퇴를 앞두고 “은퇴식에서 연주하겠다”며 색소폰 레슨을 받던 직장상사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들 중 일부는 정말로 은퇴식에서 색소폰을 불었다. 그런 수요가 적지 않은지, 지난번 구청 근처를 지나는데 색소폰 단기완성 광고가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다 중년이 새 취미를 시작할 때에는 “뒷동산을 올라가는데 에베레스트 올라갈 만큼의 장비를 샀다”는 농담처럼 장비병이 흔히 따라붙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장비병이란 종종 자기가 처음 생각했던 예산을 훌쩍 뛰어넘게 만드는데, 저자도 마찬가지다. 그는 내친김에 자신의 별장인 “물고기 오두막”에 별채로 음악실을 짓는 계약을 해 버리고, 수리가 완벽하게 된 스타인웨이를 그 음악실에 들이기 위해 보러 다닌다. (이때 만나는 피아노 딜러 제프의 이야기는 정말 세일즈의 귀감이라 할 만 하다. 예산에서 아주 조금씩 넘어가게 악기를 권하고, 사려고 했던 모델과 함께 그보다 약간 비싼 모델을 나란히 보여주는 수완이 책 중반까지 꾸준히 이어지는데, 정말 사람의 물욕을 어떻게 자극해야 하는지에 대한 완벽한 교본같다.) 저자가 자신이 90살까지 살 경우

어쨌든 바쁘다, 바쁘다 해도 그는 8월 6일부터 8월 말까지 3주에 걸친 여름휴가를 보낼 수 있고, 주말에도 피아노 레슨을 받으러 갈 수 있으며, 출근 전 20분 정도 집에서 디지털이 아닌 업라이트 피아노로 연습을 할 수 있는 환경이다. 어쩌면 대부분의 한국인보다 연습할 수 있는 여건은 더 좋을 것이다. 보통의 한국인은 3주씩 여름휴가를 보내지도 못하고, 아파트에서 아침에 어쿠스틱 악기로 연습을 했다간 바로 민원 들어온다. 무엇보다도 이 가디언의 편집장은 자신이 만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통해 발라드 1번에 대한 의견을 구한다. 트위터에서 관련 키워드들을 트윗덱에 띄워놓고, 뇌과학자를 만나 암보에 대한 의견을 묻는다. 음악가들을 만나는 것은 물론이다. “로젠은 로젠탈에게 배웠고, 로젠탈은 리스트에게 배웠으며, 리스트는 체르니의 제자였고, 체르니는 베토벤을 사사했으며, 베토벤은 하이든의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며 로젠과 대화를 나눈다. 과거 자신이 위대한 호로비츠가 발라드 1번을 연주한 그날 연주를 직접 듣고 연주회가 끝난 뒤 인터뷰를 했었다는 것도 뒤늦게 기억해낸다. 머레이 페라이아를 만나러 가면서 “피아니스트 만날 복이 터졌다”고 중얼거리고, 프레젠테이션 사이의 짬에 사이먼 래틀과 오케스트라의 연습을 볼 기회가 생기기도 한다. (이런 목록들을 보고 있으니 저녁식사 초대를 받은 곳에서 같이 밥 먹는 인물들이 데이비드 애튼버러와 데이비드 밀리밴드인 것 정도는 별로 놀랍지도 않다.)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언론인인 만큼 그런 거장들과도 안면이 있고, 인터뷰 중에 잠시 개인적인 질문을 할 수도 있지만, 이 거장들에게 자신의 프로젝트를 이야기하고 조언을 구하는 장면들을 보며 읽는 사람이 조금 부끄러워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중간중간 “아아, 중년 아저씨의 자의식이여.”하고 중얼거리며 직장상사들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들이 있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그냥. 중년의 도전 과제를 만들고 성취하면서 그걸 이만큼 두꺼운 책으로 내는 것 부터가 자의식이 매우 강한 것이고. 제1세계 중산층 지식인다운 느긋함이기도 하겠지만.

그런 중간중간의 참을 수 없는 웃김을 넘어 이 책을 끝까지 읽다 보면, 수많은 사건들로 바쁜 와중에도 매일같이 20분은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의 모습이 남는다. 그는 다음 해 워크숍에서 만족할 만한 연주를 해내지는 못했지만(그 직전에 뉴스 오브 더 월드 사건이 있었으니 어쩔 수 없다.) 지인들 앞에서 발라드 1번을 연주하는 데 성공한다. 하루 20분의 연습이 긴 것은 아니어도, 그는 꾸준히 해 냈고 목표를 어느정도 달성해낸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시간을 냄으로써 삶의 질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점이다. 업무 압박과 스트레스가 가장 심하던 바로 그때, 자그마한 탈출 밸브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업무와는 전혀 상관없는 무엇인가에 100퍼센트 전념함으로써 삶이 균형을 되찾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 흥미로운 대목은, 음악의 전파와 배포에 대한 생각들이다. 과거 TV나 라디오가 없었을 때의 청중들, 가족이나 친구들이 모여서 연주하던 실내악, 그리고 현재에 대해. 지금은 같은 곡들을 계속해서 듣는 마니아들이, 연주자의 실수나 재해석에 대해 무시무시하게 짚어내며 비판한다. 이전에 없었던 정확성이 요구되는 시대이자, 한 번의 연주가 인터넷을 통해 어마어마하게 많은 청중들 앞에서 댓글로 비평을 받게 되는 시대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편으로, 음악을 나누고자 하는 욕구들은 과거 어느때보다도 왕성하게 이어지고 있다. 연주 영상을 유튜브에 올리는 사람들, 줌으로 합주를 하는 사람들, 혼자서 여러 파트를 연습해서 1인 합주 영상을 만드는 사람들처럼. 어쩌면 지금은 아마추어 음악이 부활하는 시기일 수도 있음을 저자는 짚어낸다. 책 날개에 따르면 앨런 러스브리저는 85년 왕실 인사들을 취재하라는 명령을 받고 호주 멜버른에 파견되었는데(이 무렵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비가 호주 순방에 나섰으니 이 일인 것 같다) 이때 이미 워드프로세서와 모뎀으로 기사를 송고했다고 하는데, 애초에 기술과 그 활용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관점인 것 같다.

어쨌든, 전에 읽고 두었던 이 책을 다시 차분하게 읽게 된 계기는 바이올린 연습이다. 큰애 낳기 전에 1년쯤 문화센터에 다니다가 출산하면서 멈추고, 다시 둘째 낳고 나서 다시 시작했는데 반년만에 코로나로 문화센터가 문을 닫았다. 요즘 다리를 다쳐서 회사에 제대로 출근하지 못하는 동안 온라인으로 바이올린 강의를 듣고 낮에 시간을 내어 연습 중이다. 1년만에 유명한 난곡을 연주하겠다는 목표 같은 것은 세우지 않지만, 지금부터 꾸준히 연습하면 20년 뒤 은퇴할 무렵에는 직장상사들의 색소폰보다는 나은 소리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과연 내가 정년까지 회사에 다닐 수 있는가가 문제겠군.) 무엇이 되었든 매일 20분씩 꾸준히 연습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는 요즘이다. 일단은 기존에 쓰던 고무 약음기 말고, 금속에 실리콘 씌운 약음기를 새로 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