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68] 버트럼 호텔에서

미스 마플의 조카인 레이먼드 웨스트와 조카며느리 조앤은 미스 마플이 휴양지에서 근사한 휴가를 보내게 해 주려 한다. 하지만 미스 마플은 열네 살 때 묵었던, 소녀시절의 추억이 깃든 런던의 버트럼 호텔을 택한다. 조앤이 현재 50세가 다 되어가고, 레이먼드와 결혼한지 20년 가까이 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이야기의 미스 마플은 상당한 고령이다. 그래서인지 버트럼 호텔에서 재회한 셀리나 헤이지 부인은 미스 마플을 보고 죽은 줄 알았다며 반가워한다. 이 아름다운, 에드워드 왕조 시대의 풍경이 그대로 살아 있는 안락한 호텔에서, 미스 마플은 또다시 사건에 휘말린다. 애초에 레이먼드와 조앤도 그런 대화를 하지 않았던가.

“서인도 제도에 갔을 때에도 아주 좋아하셨던 것 같아. 물론 안타깝게도 살인 사건에 연루되기는 했지만. 고모님 나이에는 정말 안 될 일이지.”
“고모님께는 그런 일이 자꾸 꼬이는 모양이에요.”

데릭 러스컴 대령은 이 호텔에서 친구의 딸이자 자신이 후견을 맡은 상속녀 엘비라 블레이크와 만난다. 코니스턴 블레이크 경의 딸인 엘비라는 21세가 되면 6~70만 파운드에 달하는 거액의 유선을 물려받을 예정이다. 한편 이 호텔에 엘비라의 모친이자, 수많은 요란한 염문의 주인공이었던 레이지 베스 세지웍이 나타난다.

한편 런던 경시청은 러드그로브 판사와 같은 유명한 노신사의 차번호와 비슷한 차, 비슷한 외모를 하고 은행을 터는 조직적인 강도 사건을 뒤쫓고 있다. 그들이 의심하고 있는 자동차 경주 선수 라디슬라우스 말로노프스키는 레이디 세지웍의 연인이자, 현재 엘비라 블레이크를 유혹하고 있다. 미스 마플은 어머니와 딸이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경쟁하는 것을 눈치채고, 엘비라는 자신이 물려받을 재산으로 말로노프스키를 사로잡으려 한다.

대규모 강도 사건이라든가, 노년의 남성 명사와 비슷한 모습으로 변장하고 나타나는 범죄집단의 이야기가 미스 마플 시리즈의 평소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푸아로가 여기 있었어도 어울릴 것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 자신을 버린 어머니에 대한 애증과, 어머니와 딸에 대한 관계를 설명하기에 푸아로는 썩 어울리지 않는다. 이 미묘한 분위기나 후반의 급전개는, 어쩌면 푸아로를 넣은 범죄집단 이야기를 쓰려고 하다가 이쪽으로 선회한게 아니었을까 하는 느낌도 받게 한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이 책은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는 페이지 터너인데다, 사실 그와 별개로 소설 속에 묘사되는 이상적이고 안락한 호텔의 풍경은 읽고 있는 것만으로도 책 속에 들어가서 며칠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마치 오 헨리의 아르카디아의 나그네를 읽을 때 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