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포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팬들 사이에서도 평이 좋지 않은 작품이다. 우선 열두 편의 단편들을 이어붙이다 보니 장편으로서의 응집력이 좋지 않다.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떠올린 책은 어릴 때 읽은 “괴도 신사 아르센 뤼팽”의 번역본, “괴인 대 거인”이었는데(이 번역에서는 헐록 숌즈가 셜록 홈즈로 나온다) 각각의 단편은 재미있고, 처음에 뤼팽이 체포되었다가 탈옥하고, 다시 여러 사건이 이어지는데, 책 전체를 죽 이어서 읽을 때는 꽤 정신이 사나웠다. 어른이 되어서 다시 성귀수 님 번역으로 읽으면서야 이게 그렇게 정신사나울 내용은 아니었는데 하고 생각했지만. 빅 포도 그렇다. 빅 포는 고등학생 때 처음 읽은 것 같은데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이번에 다시 읽을 때에는 그냥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여사님이 세계를 정복, 아니 사회질서를 붕괴시키려는 국제적인 악당에 대해 쓰고 싶으실 수도 있지, 뭐. 솔직히 이번에 읽을 때에는 만화 “소녀교육헌장”에 나오는 빅브라더를 생각하면서 신나게 읽었다. 일단 레닌과 트로츠키를 조종하는 막후 실력자이자 동양을 지배하는 수괴이고 중국 지하세계의 지배자인 리창옌 같은 캐릭터를 이름만 등장시키고 안 써먹는 패기는 그렇다고 치고, 빅 포의 2인자는 록펠러를, 3인자는 마리 퀴리를 모델로 삼은 것에는 읽는 내내 낄낄거릴 수 밖에 없었다. 요즘으로 치면 누가 세계를 지배하려는 악당들과 싸우는데 악의 조직 빅 포의 1인자는 달라이 라마이고 2인자는 도널드 트럼프, 3인자는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이었다는 이야기 같잖아.
막판에 푸아로의 형님인 아킬 푸아로 트릭은 지금 보니 너무나 마이크로프트 홈즈 오마주여서, 읽는 내내 유쾌했다. 베라 로샤코프 백작부인이 등장하는 장면들도, 지금은 영화 “셜록 홈즈”(가이 리치)에 나오는 아이린 애들러가 생각나서 짧지만 즐거웠다. 어쩌면 빅 포 하나만을 두고 읽는다면 재미없고, 응집력 떨어지는 소설이었겠지만, 웹소설처럼 여러 밈을 응용하고 계속 에피소드가 튀어나오는 이야기들이 연재되고, 그걸 모아서 정주행하는 지금 시대에는 오히려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