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 김하나, 황선우, 위즈덤하우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읽기 시작하고 곧, 한 문장이 눈을 끌었다. 마치 베이커 가 221번지의 하숙집을 구하려면 집세를 같이 낼 누군가가 필요했던 셜록 홈즈를 떠올리게 하는 문장이었다.

황선우는 남녀를 떠나 내가 만나본 가장 매력적인 대화 상대였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황선우 또한 20년이 되어가는 혼자의 삶에서 벗어나 다른 형태의 삶을 모색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만날수록 이 사람이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겐 봐둔 집이 있었고 그 집을 구하려면 파트너가 필요했다. 나는 이 사람과 같이 살고 싶었다.

그 문장은 내게 결혼이나 동거에 대한 여러가지 생각을 떠올리게 했는데, 사실 그렇다. 살다 보면 이 사람과 같이 살면 좋겠다 싶은 사람을 만나는 행운과 맞닥뜨리는 순간이 있다. 하지만 그걸 공식화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너무나 많다. 결혼이 아닌 관계인데 둘이 함께 사는 것에는, 법적으로 보호받을 만한 무엇도 없다. 설령 원가족과 완전히 결별하고 이 사람과 새로운 가족을 만드는 것이라고 해도, 결국 수술을 하거나 죽음을 맞거나 했을 때 이 가족은 개입할 수 없고, 원수같은 원가족이 나타나서 다 휘두르고 빼앗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남녀간의 결혼은 수월한가? 다른 모든 경우의 수에 비하면 수월하고 보편적으로 보이지만, 두 남녀가 결혼을 하겠다고 결정한 그 순간부터 이 일은 두 사람의 일이 아닌, 양가의 일이 되어버린다고 믿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변수들이 양쪽(특히 남자 쪽)에서 나타나 이 커플의 미래를 축복하는 건지 방해하는 건지 알 수 없이 군다. 이러면서 젊은 사람들이 결혼을 하지 않네 뭐가 어떻네, 그런 말만 하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성인이 된 사람이 자기가 같이 살고 싶은 사람을 만나서, 어떤 형태든 관계를 만들고 같은 거주지에서 의지하며 작은 공동체로서 살겠다는데. 사회가 안 도와주잖아.

나는 그 순간에야 내적 눈물을 흘리며 정현종 시인의 시를 온몸으로 이해했다. 사람이 온다는 건 /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 그는 / 그의 과거와 / 현재와 / 그리고 /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 정현종, 「방문객」에서

어쨌든 이렇게, 부동산을 매개로 서로 다른 두 사람은 함께 살게 된다. 그리고 위에 인용한 저 시가 나오는데, 나는 사람이 집에 짐을 쌓아놓고 산다는 이야기를 저렇게 표현하는 걸 처음 봐서 정말 읽다가 눈물이 나도록 웃어댄 뒤 무척 반성했다. 요리를 무척 잘하지만 집안에 대왕릉을 형성해놓고 사는 맥시멀리스트와 깔끔한 미니멀리스트의 결합이라니. 이 대목의 묘사는 읽으면서 무척 찔리고(우리집엔 딴건 별로 없어도 책 하나는 집안에 왕릉 두 개를 쌓고 남을 만큼 많지) 또 재미있었으며, 중간중간 “노다메 칸타빌레”의 노다메와 치아키 선배를 떠올리게 했다. 물론 치아키는 노다메의 재능에 이끌렸지만, 그렇게 라이프스타일이 다른데 어떻게 친해지고 진저리를 내면서도 그녀의 일상을 돌볼 수 있었을까? 이 책에는 그 답이 있었다. “비슷한 점이 사람을 서로 끌어당긴다면, 다른 점은 둘 사이의 빈 곳을 채워준다.”는 것. 그렇게 하여 두 여자와 네 마리의 고양이는 한 집에서 살게 된다.

사실 같이 살겠다고 생각한 두 사람의 관계에서 제일 흥미진진하고 드라마틱한 부분은 두 사람이 같이 살게 되는 과정이다. (결혼을 한 경우) 결혼식이라든가 이사라든가 살림이 합쳐지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온갖 이벤트와 충돌과 싸움이 있으니까.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도입부고, 정말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그리고 내게는 이 부분들이 더 인상적이었다.

같은 싱글 라이프라도 ‘자취’라는 말과 ‘독신’이란 말의 뉘앙스는 엄연히 다르다. 물론 개인마다 받아들이는 어감의 차이가 있겠지만, 자취는 ‘임시적, 결혼 또는 독신 생활 이전의 시절, 과도기’ 같은 느낌이라면 독신은 ‘반영구적, 반듯함, 자기 절제, 여유’ 같은 느낌이 든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얼마 전 트위터에서 “자취할 때 엄마에게 대충 물려받은 그릇” 같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가 나왔다. 대학에 가거나 취업을 하면서 혼자 살게 되었을 때, 그것이 인생의 새로운 출발이 아니라 일종의 유예로 받아들여지면서, 좋은 새 그릇은 결혼할 때 사는 것이고 이때는 그냥 적당히 낡은 걸 쓰다가 버린다는 식으로 넘어갔던 기억들에 대해 사람들이 이야기를 했다. 그게 아니라는 걸, 혼자 산다고 이빠진 그릇에 라면을 끓여먹는 게 아니라, 혼자라도 자신을 위해서 좋은 그릇을 꺼내 잘 차려먹을 수 있는 그런 마음에 대해서도.

내 경우는 집에서 그냥 쫓겨났으니 물려받은 그릇 같은 건 없고, 대충 주변 친구들이 결혼하기 전에 쓰던 그릇들을 좀 얻어다가 살림을 시작했다. 어수선했다. 내 취향과는 상관없는 남이 쓰다가 지금은 안 쓰는 그릇들은 내 방에서 서로 충돌했고, 나는 급히 집을 나올 때 그릇값이라도 안 들어서 좋았다고 생각하면서도 밥 먹을 때 마다 내가 밥그릇 하나 내 것으로 제대로 안 사고 남에게 얻어다 쓰다니 거지같다고 자괴감에 빠지곤 했다. 여기서 누가 “집에 버리는 그릇 있는데 가져갈래?”라고 말했을 때는 마침내 폭발을 일으켰지만, 그렇다고 내 살림을 새로 살 생각을 하진 못했다. 그때의 나도, 이건 자리를 잡기 전의 유예기라고 생각했으니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제대로 된 물건이 다만 몇 가지라도 있어야 한다는 것, 특히 자기 밥그릇처럼 매일 쓰는 물건은 더 그렇다는 것. 이 책에서는 수건의 유통기한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나는 우리 집의 수많은 돌잔치와 결혼식 수건들 사이에서 아직도 자꾸 튀어나오는 빨간색 대전엑스포 수건(…..) 같은 것을 생각하며 실소했다. 그리고 그놈의 대전엑스포 수건이 다시 발견되면 꼭 내다 버리겠다고 생각한다. 체셔 고양이처럼 자꾸 도망을 다녀서 아직 못 잡고 있지만. 어떤 면에서 내 살림은 아직도 “자취”레벨이 아닌가, 그놈의 대전엑스포 수건을 떠올리며 좀 반성을 했다. 자기 생활을 영위할 수 있지만, 자기 스타일로 생활을 꾸려가는 데는 아직 한참 모자란 단계 말이다. (그리고 호텔 수건의 푹신함을 사랑해서 중간중간 구입도 하지만, 이 집에는 너무나 많은 돌잔치 수건들이 매년 리필되고 있다. 엊그제도 두 장 생겼다.)

그렇게 살림을 합치고, 두 사람은 서로 맞부딪치고 뒤섞이며 서로를, 그리고 나아가 자기 자신을 발견해 나간다. 새로운 운동을 배우며 쓰지 않은 근육들을 찾아내듯이, 타인과 파자마 바람에 집에서 뒹굴거리며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지나치게 골똘해지거나 불안에 잠식당할 확률이 현저하게 줄어”드는 것을 느끼고, 누군가가 항상 집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에 평화를 느끼기도 한다. 그런, 뒤로 갈 수록 잔잔한 일상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을 보며, “가족”을 만드는 것에 대해, 그리고 그 가족이 사회에서 보호받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그 모든 일이 법률이나 원가족의 “방해”를 받는 것이 아니라, 같이 가족을 이루어 무리짓고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원하면 그대로 되어야 하지 않나 하고. 최소한 내 중요한 일을 내 혈연적인 원가족이 아니라 지금 나와 같이 살고 있는 사람이 함께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이 책의 저자들과는 다른 경우지만, 원가족과 안 보고 살거나 혹은 원가족이 없는 채로 혼자, 혹은 다른 사람과 둘이 살고 있는 이들은 내 주변에도 적잖이 많으니까. 얼마 전 누군가가, 이대로 자신이 죽는다면 자신에게는 친구들이 이렇게 많은데도 무연고자가 된다는 말을 했었다. 친구들, 이웃들, 같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권리가 없다고. 1인가족의 비율이 점점 커지고 있고, 예전처럼 형제가 많은 것도 아니니 점점 이런 경우가 많아질 것이다. 언제까지 “4인가족 모델”, 남자에게 아내와 자식들을 만들어주는 것을 기본으로 생각하는 모델을 중심으로 생각할 것인지, 좀 더 많은 형태의 가족에 대해 생각하고 법률로써 보호해 줘야 하는 것이 아닌지, 계속 생각하게 된다. 이 책의 저자들이 보여주는 모델은, 사실 “희망편”에 가까우며, 현실에서는 정말 많은 문제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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