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 백남준 – 구보타 시게코, arte

나의 사랑 백남준
나의 사랑 백남준

플럭서스 운동에 매료된 젊은 미술가이자 교사 구보타 시게코는 백남준의 퍼포먼스를 보고 매료된다. 한편 해방 후 최대의 섬유업체인 태창방직의 사장이자 무역상이던 백낙승의 아들 백남준은 한국에서 여권번호 7번을 받아 아버지를 따라 홍콩으로 갈 만큼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중학교 때 음악교사였던 작곡가 이건우에게서 쇤베르크의 음악세계를 배웠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바로 홍콩으로, 다시 일본으로 도망친다. (그 전쟁이 시작되는 와중에 어머니가 파인애플을 깎아먹였다는 초현실적인 이야기를 읽으면서 백남준이 얼마나 대단한 부잣집 아들이었는지 실감했다.) 일본에서 백남준은 미학을 공부하고 존 케이지의 전위음악에 눈뜨며, 다다이즘과 맥이 닿은 플럭서스 운동의 한가운데로 뛰어든다.

이 책을 좀 더 일찍 읽었다면, 백남준에 대해 주목하며 읽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구보타 시게코에게 더 관심이 간다. 그녀는 백남준과 마찬가지로 플럭서스 운동에 뛰어든 전위예술가였고, 그와 마찬가지로 비디오아트를 추구했다. 미학을 전공하고 전위음악에 심취했던 백남준과 달리 그녀는 고등학교 때 일본에서 미전 입상을 했던 미술학도였고, 본문에서도 “나는 조형은 안 돼”하고 고민하던 백남준에게 조소적인 미감을 보완해 주었다는 대목들이 보인다. “때로 남준이 미술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좌절할 때면 그를 달래고 자신감을 불어넣는 일도 나의 몫이었다.”같은 언급도 있다. 물론 이런 것이, 구보다 시게코에게 득이 되었을 리는 없다. 그녀는 자신이 아류가 아니라 독립된 예술가로서 인정받기 위해 그 이상으로 노력해야 했다.

우리 둘 다 비디오아트를 한다는 사실이 나로서는 엄청난 짐이 아닐 수 없었다. 자칫 남편의 예술세계를 베껴먹는 얄팍한 날치기 작가로 매도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중략) 누구도 시비를 걸 수 없는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야 살 수 있다는 걸 나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남준의 옆에서 연인만이 아닌 예술가로서도 살아가야 한다는 건 거의 치열한 전쟁과 같았다.

뛰어난 남성 예술가의 아내, 연인, 동반자, 여제자 등이 어떤 식으로 소모되었는가, 에 대해서는 수도 없이 많은 이야기들이 나온다. 클라라 슈만이나 까미유 끌로델은 이젠 더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을 정도고. 백남준의 경우도 구보다 시게코에게 비디오 아티스트로서 영향을 끼치고, 그녀의 조형감각을 자신의 작품에 반영하는 등, 그녀의 능력에 많이 의지한 모습을 보인다. 구보타 시게코의 작품인 “마르셸 뒤상의 무덤”을 응용한 “비라미드”같은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물론 백남준이 처음부터 그녀의 능력을 인정하진 않았다. 이런 상황이면 대체로 그녀가 소모되고 파묻히기 쉬웠겠지만, 구보타 시게코는 운이 좋았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과 말로 말할 수 있는 시대에 태어나, 각고의 노력 끝에 자신의 능력과 예술성으로 독립된 예술가로서 인정받았다.

어찌 된 영문인지 이번 전시회를 앞두고 남준은 여간 까칠하게 구는 게 아니었다. 뒤샹의 무덤 장면도 “카메라가 너무 흔들려 정신이 없다”고 트집이었다. (중략)
허나 나는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내 믿음대로, 계획대로 작업을 밀고 나가 뒤샹을 주제로 한 전시회를 열었다. 결과는 보란 듯 대성공이었다.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고, “아트 인 아메리카”에서 비디오 아트 작가 시리즈를 연재할 때 커버스토리에 백남준보다 먼저 실릴 만큼 인정받는다. 물론 이럴 때 백남준의 반응이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배우자가 성공했을 때 남자가 열등감을 보이는 반응 그 자체다.

“당신 작품이 ‘아트 인 아메리카’에 나왔네. 거 참 세상일 알 수 없다니까…..”
내가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두며 이름을 알리자 아이같은 성격에 누구보다도 솔직담백한 남준은 떨떠름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런데다 구보타 시게코는 백남준과의 결혼생활 중 그의 작품활동을 위해 계속 금전적인 걱정을 해야 했다. 같은 비디오 아티스트라도 그녀는 최소한으로 TV를 사용해야 했지만, 백남준은 아낌없이 사들였다. 심지어 날이 추워지면 백남준은 뉴욕을 떠나 플로리다에서 겨울을 났지만, 구보타 시게코는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큐레이터로 활동하여 돈을 벌기 위해 같이 갈 수 없었다. 동경과 사랑에서 시작된 동지의식, 같은 길을 걷는 예술가 커플. 붙일 수 있는 말은 많지만, MOMA에 대표작인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 비디오 아트를 전시할 만큼의 성과를 거두었던 그녀가 백남준과 같이 살지 않았다면, 그냥 영향만 주고받으며 혼자 살았더라면 어떤 작품들을 만들어냈을까. 어째서 똑같은 분야를 걷고 있는 예술가 커플인데, 한쪽의 희생이 더 강조되어야 하는가. 그나마 그녀는 “성공한 예술가”로서 자리를 잡았고, 단물만 빨아먹히고 차인 예술가의 연인이나 뮤즈가 아니라 “아내”로서의 자리를 가졌으며, 더 오래 살았고, 자신이 보고 듣고 기억하고 느낀 것을 창작물을 통해, 그리고 말과 글을 통해 남길 능력이 있었으니 망정이지. 세상 여기저기에서, 그런 식으로 재능과 그 재능을 구체화 할 능력을 지닌 여성 예술가가 남성 예술가의 예술혼을 불태우는 동안 돈을 벌고 그의 아류가 되지 않으려 몸부림치다가 끝내 무시당하고 좌절하는 일은 얼마나 많이 벌어질까. 고통스러울 정도로 그런 생각들을 곱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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