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읽기-064] 테스 (토머스 하디) 민음사 세계문학 205, 206

테스
테스
테스

테스를 처음 읽었던 것은 중학교 1학년 때. 그때 나는 용돈을 아껴서, 학교 근처에 천원, 천오백원 하는 떨이 책장수가 올 때 한두 권 씩 사거나 아니면 학교 앞 서점에서 삼중당이나 을지, 범우문고 등을 구입하곤 했다. 사랑방손님과 어머니며 빈처, 그런 책들이 모두 그렇게 사서 읽은 것들이었다. 테스도 마찬가지. 학교 앞에 그 천원 천오백원 하는 떨이 책으로 나온 것을 사서 읽었으니, 지금 다시 읽은 것과는 두께부터 비교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도 선연히 기억나는 것은 그, 그 책의 뒤에 실려 있던 작품 해설. 그 작품 해설에는 무려, 테스가 불행해진 것은 “첫째로 몸을 잘못 굴렸기 때문이요, 둘째로는 첫날밤에 남편에게 진실을 말했기 때문”이라는 어마어마한 말이 붙어 있었다는 것. 아, 그래. 뭐 사실 까놓고 말하면 엔젤이 물어봐도 딱 모르는 체 했으면 될 일이긴 했겠지만, 여튼 테스가 아니라 테스의 처녀막만 사랑한 엔젤이 한심한 놈이지, 이게 웬 멍멍이 쌈싸먹는 소리냐 싶은 그 작품 해설에 쓰러질 뻔 했었던 기억이 먼저 떠오르는 것을 보면, 그때의 충격이 어지간히 심하긴 심했던 모양이다.

이번에 다시 읽은 테스는, 무려 두 권 분책이 될 만큼 두꺼웠다. 그러니 그때의 번역이 또 얼마나 날림이었을 것이며. 생각해 보면 테스의 내용을 읽다가 앞뒤가 좀 안맞는다 싶었던 것들이 이래저래 다 쳐내고 차 떼고 포 떼고 그래놓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지만, 이번에 다시 읽은 책은 그때의 그 충격적인 작품 해설도 없고, 번역도 매끄러워 읽기 수월했다. 무엇보다도 중학생이 보는 세계와 지금 서른 한 살이 보는 세계는 또 다르니까. 처음, 처음 5월의 무도회에서 엔젤과 스쳐 지나갔던 처녀 테스, 그녀가 집안의 가난을 끌어안고 가족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짊어져야 하는 짐에는, 몰락한 테스의 집안, 더비필드 집안과 인척관계가 있다는 부유한 더버빌 집안에서 일을 하고, 그 와중에 더버빌 집안의 아들 알렉에게 농락을 당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니, 사실은 그 가족들 역시 어쩌면 바로 그 부분을 기대하고 딸의 운명을 그리 떠다맡겼을 것이다. 꼭 그녀의 촌무지렁이 부모들이 아니더라도,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크게는 자신들의 영달을 위해서, 작게는 당장 때울 끼니를 위해서 딸을 팔았던가.

흔한 이야기다. 가난한 집의 아름다운 딸이 부잣집 도령에게 농락당하고 돌아오는 이야기는. 그나마 테스가 멀쩡한 인생을 살고 싶었다면 어떻게든 매달려 알렉과 결혼을 하거나 적어도 그 시대로서는 차라리 보편타당하게 그의 정부 노릇이라도 하는 게 제일 편한 결말이었으리라. 하지만 테스는 알렉을 사랑하지 않는다. 알렉은 떠나고 테스는 집으로 돌아와 버린다. 그의 아이를 임신한 채. 이 이야기 전체에서 가장 소름끼치고 감동적인 장면은 그 다음에, 테스가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어버리는 그 처절한 장면에서 드러난다. 사생아라는 이유로 교구 목사조차 돌아보지 않은 그 아이가 숨을 거두려 할 때, 테스는 직접 자신의 아이에게 세례를 주고 죄를 사하여 준다.

그래, 아까 말했다. 그놈의 작품 해설. 그것도 그랬지만

이 소설을 중학교때 읽을 때 선생이 뭐라고 했는지 아는가?
여자는 몸조심을 해야 한다고 했다. 뭐, 그말은 틀린 말이 아니지만.
적어도 이 소설에서는 남자놈들이 더 한심하지 않은가.

알렉도, 엔젤도, 그리고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로 밥벌어먹고 살면서, 사생아라는 이유로 테스의 아이를 외면하는 교구 목사까지도.

사생아라 세례조차 받지 못한 죽어가는 아이에게 직접 세례를 주던 테스의 모습은 이 소설에서 굴러먹던 알렉이나 이름만 엔젤같은 놈팽이보다 수십배는 더 강하다. 물론 엔젤이 정말로 테스의 처녀막만 사랑한 것은 아닐 것이며, 알렉이라고 해서 테스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겠으나, 테스의 인생에서 똥을 밟은 일이 알렉 더버빌을 만난 것이라면, 뱀을 밟은 일은 농장에서 엔젤을 다시 만난 일일 것이니. 이 한심한 놈팽이들이 한 여자의 인생을 어떻게 말아먹었는가를 생각하며 보고 있다보면 다 나가죽어라 소리가 여기까지 나온다. 그래, 알렉같은 놈은 그렇다고 치고 어쩌자고 엔젤같은 놈을 사랑한거냐, 이 여자야.

처음에 집안 이야기를 하다 말았는데, 애초에 도붓장수인 더비필드 집안이, 유서깊은 더버빌 가문과 친인척이라고 해서 뭐 얼마나 인생이 달라지겠는가. 게다가 알렉 더버빌의 조상이 그 더버빌 가문의 족보를 사들인 것이라, 실제로는 친인척 관계도 아닌데. 생각해 보면 한심한 이야기다. 여튼, 알렉 더버빌은 더비필드네 식구들을 촌사람들로 여기고 있었으므로 실제로 테스와 결혼할 마음은 없는 듯 해도, 그녀를 사랑한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는 떠나 성직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물론 신부가 아니라, 목사 쪽이지만. 그리고, 목사라는 직업이 발목에 반쯤 얽혀 있는 또 다른 남자가 테스의 앞에 나타난다.

엔젤 클레어는 목사의 아들이었다. 목사가 되고자 하는 다른 형제들과 달리 그는 목장에서 일하며 농사를 배운다. 테스가 일을 하러 간 바로 그 농장이다. 테스는 몇 번이나 자신의 과거를 말하고자 하지만 결국 말하지 못한 채 두 사람은 결혼한다. 그리고 첫날 밤, 엔젤은 자신의 과거 – 다른 여자와 간음한 잘못 – 에 대해 털어놓는다. 엔젤의 고백에 용기를 얻은 테스도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지만 엔젤은 충격을 받는다.

 “내가 사랑해 온 여자는 당신이 아니야”

그래, 내가 사랑한 건 당신이 아니라 내 환상일 뿐? 그래서 엔젤은 난 이제 더 이상 당신을 원하지 않는다는 무슨 20년 전 신해철이 댄스가수 흉내내며 아이돌 스타로 군림하던 시절의 노래 가사처럼, 테스를 떠나버린다. 나는 바담 풍 해도 너는 바람 풍 하라는 이기심이요, 그러면서도 아주 이혼한 것도 아니고 이 결혼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자고 희망고문을 남기며 떠나는 것은 더 나쁘다. 엔젤은 브라질로 떠나고, 결혼하자마자 엔젤이 떠난 일로 또다시 구설에 오르게 된 테스는 더욱 척박한 환경에서 일을 하고 고생하던 중 전도사가 되어 돌아온 알렉 더버빌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전도사가 되었다고 사람이 바뀐다면, 한국에 왜 에어장 같은 인물이 있으랴. 테스와 재회하고 옛 욕망에 다시 사로잡힌 알렉은 목사의 신분을 버리고 다시 테스에게 집착한다. 이제 산전수전 다 겪은 테스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내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테스의 여동생이 찾아와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하고, 겨우 어머니가 병에서 회복되자마자 아버지가 숨지는 바람에 더비필드 일가는 소작을 하던 토지와 집을 모두 내놓아야 하는 위기에 처한다.

팔 것은 몸 밖에 없다는 게, 아마 그런 상황이었을 거다.

그리고 그 가족은 결국, 맏딸인 테스를 팔아 손쉽게 그 문제를 해결한다. 물론 알렉이 테스를 유혹하며 자신과 같이 살아준다면 가족들을 경제적으로 돕겠다고 제안한 것이지만, 그 선택은 테스가 했을지언정 처음부터, 그 부모가 딸 팔아 영달 누리려 했던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테스는 절박한 사정을 엔젤에게 편지로 알리고, 브라질에서 병을 앓고 농사에도 실패한 엔젤은 그녀를 찾아 돌아온다.

하지만 이미 테스는 알렉의 정부가 되어 있었다.

물론 한 번 그렇게 인생이 꼬였는데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알렉에게 돌아갈 수 밖에 없는 테스의 처지가 답답하고 안타깝기 그지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면 결혼 첫날밤에 남편에게 소박까지 맞은 여자에 대해 그 남편이 무슨 권리를 주장할 것이며, 그녀의 “타락”에 대해 무슨 입이 있어 할 말이 있느냐 이거다. 모든 것을 알아채고 상처입은 듯 피해입은 듯 돌아서지 말란 말이다. 아니, 엔젤은 그 시점에 나타나지 말았어야 했다.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소원이 이루어지듯, 둘은 그렇게 다시 만나고, 절망한 테스는 알렉의 빈정거리는 말에 그를 살해한다.

그제야 엔젤은, 테스를 지켜주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 결심 참 빨라서 좋다. 한심한 놈.

그리고 두 사람은 한 주를 함께 보낸다. 도망친 끝에 테스는 이교도들의 무덤이자, 영국 드루이드 신화의 근원인 저 스톤헨지에서 여동생을 엔젤에게 부탁하고 잠든다. 기독교의 문화, 가부장의 문화가 아닌 이교도의 문화이며 마녀의 문화가 지배하는 그 땅에서 겨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의미일까. 하지만 경찰은 잠든 그녀의 앞에 나타나고, 테스는 결국 체포되어 처형된다. 서정주의 춘향유문에서 춘향은 “향단아, 그네줄을 밀어라.” 하며 저 하늘로 나아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이 땅에 묶어두었던 그 그네줄처럼, 기독교와 가부장의 문화는 그녀를 수렁과 오욕으로 밀어넣은 그 모든 놈팽이들, 한심한데다 딸 팔아 영달 누려보고 싶어했던 아버지와, 소유욕과 사랑을 분별치 못한 엔젤과, 육욕에 눈에 먼 알렉, 그 남자들의 이야기를 배제한 채, 그녀의 죄만을 묻는다. 결국 뻔뻔한 것은 그 셋 모두이고, 세 놈팽이거 공모해서 한 여자의 인생을 개판으로 만든 처절한 이야기이에도 불구하고. 엔젤과 알렉이,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 역시, 테스를 사랑하고 걱정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누가 그놈들이 테스를 걱정하지 않고 오히려 괴롭혔다고 하였나?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결국 욕망의 다른 이름일 뿐이었고, 그들에게 있어 테스는 한 인간 여성이 아닌, 어찌 되었건 수단에 불과하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스톤헨지에서 잠드는 테스의 모습은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왜, 어째서 알렉을 죽이고 하필 엔젤과 함께 그곳으로 가는지. 나는 엔젤이 마지막에 함께 있는 것이 너무나 불만이었다. 테스는 혼자서도 죽을 수 있었다. 왜 엔젤이 그녀와 함께 가는가? 그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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