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읽기-030] 운명의 딸 (이사벨 아옌데) 민음사 세계문학 163, 164

칠레의 발파라이소, 영국에서부터 이민을 온 칠레의 한 귀족 가문, 소머스 가. 이 집안의 딸인 미스 로즈는 첫사랑이 좌절되고 사랑을 포기하며 자신의 운명에 어떤 식으로든 순응하였지만 어느날 이 집 앞에 버려진 여자아이를 딸 삼아 키우게 된다.

미스 로즈가 구세대의, 구대륙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운명에 순응하는 여성을 대변한다면, 마마 프레시아는 칠레의 원주민으로, 주술을 쓰는, 다시 말해서 여자를 통해 ‘지식’이 전수되고 그 지식이 힘을 갖는 사회를 대변한다. 물론 그 주술과 미신의 힘은 미약하지만, 얌전한 귀족가의 영애로 자라나던 엘리사의 무의식에 마마 프레시아의 힘과 영향력은 크게 작용한다. 그리고 1권의 후반에서,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 캘리포니아로 떠나려 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신분이 낮은 남자로 소머스 회사의 말단 사원이었던 호아킨, 그리고 미스 로즈와 마찬가지로 구세대의 여성을 대변하는 그 어머니가 등장하고, 귀족가의 영애로 훌륭한 결혼을 할 수도 있었던 엘리사는 호아킨과 불꽃같은 사랑에 빠진다. (일단 이 사랑부터가 그녀가 운명을 거스르는 강한 성격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적어도 이 시대에는) 그러나 호아킨은, 사랑의 장애를 뛰어넘어 결혼하겠다는 생각보다는 골드 러시의 땅, 희망의 땅인 캘리포니아로 떠나고, 엘리사는 자신이 임신한 것을 알게 된다.

이때, 앞에서부터 간간히 등장하던 중국인 한의사 타오 치엔이 무대의 전면으로 나선다. 그때까지는 어째서 이 남자가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조금씩 나왔을 뿐이던, 한의사이며 상처한 경험이 있는 체구가 작은 이 동양인 남자는 임신한 엘리사가 밀항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함께 캘리포니아로 떠난다.

1권의 힘의 구도는, 신대륙이지만 구대륙의 정서와 도덕, 습관을 그대로 가져가는 귀족 사회에서 운명에 순응하기를 바라는 귀족들과 여자들, 그리고 독립된 여자로서의 힘과 생명력을 암시하는 원주민 마마 프레시아와, 새로운 희망을 위해 이 땅을 떠나는 남자의 모습 사이에서 엘리사가 여자로서의 순탄한 인생을 버리고 미국으로 떠나는 모습과 함께 그녀의 순탄치 못하지만 격렬하고 힘이 넘치는 인생의 시작을 보여준다. 또한 타오 치엔은 마마 프레시아를 대신하여, 그녀의 퇴장과 함께 무대 전면으로 나서며 신비스러운 힘을 대변한다. 먼저 읽었고 다시 읽고 감상을 남길 예정인 운명의 딸과 마찬가지로, 아옌데의 소설에 묻어나는 마술적인 힘을 대변하는 이 남자는 무책임한 호아킨과 달리 책임감있고 성실하며, 죽은 아내의 기억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이 두 사람의 여행이, 엘리사의 인생의 새로운 시작이 된다.

타오 치엔에게 모든 것을 맡긴 채 밀항하던 엘리사는 결국 아기를 유산한다. 타오 치엔은 엘리사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의 죽은 아내의 환영은 이 여자가 강한 운명을 갖고 있다고, 살리라고 말한다. 타오 치엔의 보살핌 속에, 엘리사는 목숨을 건진다.

그녀는 캘리포니아에 도착하며 남장을 하고, 호아킨의 남동생을 자처하며 그를 찾아 나선다. 하지만 간간히 들려오는 그에 대한 소문은 환멸을 가져올 뿐이고, 남장했다는 사실이 들통나면 모든 것을 잃게 될 수도 있는데도 엘리사는 그를 놓지 않는다. 타오 치엔에게 배운 것들, 마마에게 배운 것들, 귀족가 영애로서 배웠던 모든 것들은 그런 그녀의 인생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 마마의, 원주민의 미신과 주술이 “지식”으로서 여자에게 힘을 주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에게도 지식은 인생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된다. 피아노, 영어, 약초학과 의학. 그녀가 무지한 여자였다면 이겨낼 수 없는 역사의 흐름을 용기있게 헤쳐나갈 수 있었던 근원에는 그 지식이 있었다. 또한, 자신의 목표, 처음에는 그저 사랑하는 남자인 호아킨을 찾고자 했던 그 여정에 조금씩 다가가며, 그녀는 자신이 좇고 있던 것이 어떤 환상이나 그림자임을, 그리고 자신의 곁에 있던 현명하고 사려깊은 남자를 깨닫게 된다.

타오 치엔. 아무리 신대륙이라고 해도, 지식이 뛰어나다고 해도 차별받을 수 밖에 없는 동양인 사내.

그 남자를 사랑하게 된 엘리사에게 있어, 호아킨이라는 최초의 목표는 이미 빛을 잃었다. 하지만 엘리사는, 그 여정을 끝까지 계속한다. 호아킨의 죽음을 알게 될 때 까지. 그리고 호아킨의 죽음을 알고, 그녀는 말한다. 자신은 자유로워졌다고. 그것은 고향이나 가족, 여자라는 성별 외에도 자신을 속박하던 또 다른 하나, 그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여기까지 끌고 왔던 별볼일없는 남자에게서 자유로워졌으며, 이제 아무 거리낌 없이 타오 치엔과 살아갈 수 있음을 뜻한다. 아마도 타오 치엔이라면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그녀를 속박하지 않고 가족이자 형제이며 연인으로, 그 모든 관계 이전에 당당한 한 사람으로 인정하며 함께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이제 돌아와 거울 앞에 선 그녀는, 고향의 미스 로즈에게 보낼 사진을 찍는다. 자신의 인생을, 그 출발점으로 돌려보내는 듯한 의식을 바라보며 나는 가슴이 먹먹했다. 지금 내가 하려는 선택, 내가 하고 있는 선택 역시도, 언젠가는 이렇게 나는 살아왔노라, 내가 지금 두고 떠나려 하는 이들에게 말해 줄 날이 올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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