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리아브론 수도원의 밤나무. 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던 때가 있었다.
이하 독후감들을 보면 한때 이 사람이 헤세 빠였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좋아했던 것이 지와 사랑,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였다. 제목을 보면, 혹은 두 인물의 성향을 보면 센스 앤 센서빌리티와 뭐가 다르랴 싶은 느낌도 들지만, 제인 오스틴 류의 로맨스 소설(그렇다, 로맨스 싫어한다)과는 격을 달리하는 이야기. 물론, 요즘 연달아 헤세를 읽고 있으려니 헤세의 그 많은 소설들이 사실은 어떤 변주에 가깝다는 느낌을 아니 받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지만 말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 꾸준히 자신의 길을 걷는 자 : 고빈다(싯다르타), 나르치스
- 유혹하는 자 : 헤르만 하일너(수레바퀴 아래서), 데미안
- 자기 안의 신성을 깨달은 자 : 데미안, 에바 // 싯다르타, 골드문트, 싱클레어 // 나르치스
- 구도하는 자 : 싯다르타, 싱클레어 // 나르치스
- 방랑자이자 예술가 : 골드문트, 크눌프, 헤르만 하일너
- 자기 안의 무엇을 깨달을 뻔 했으나 실패한 자 : 한스 기벤라트
굳이 분류한다면 이런 식이 아닐까. 이런 인간형들이, 데미안과 싱클레어, 고빈다와 싯다르타, 헤르만 하일너와 한스 기벤라트와 같이 서로 만나고 부딪치고 대립하거나 서로 이끌며 상대를 지금의 현실에서 일어나 도약하게 한다. 어느 순간 예술가적 기질을 가진 이는 꾸준한 길을 걷는 자의 곁을 떠나고, 다시 만났을 때 그 꾸준한 길을 걷던 예전의 스승이자 친구를 도약시킨다. (물론 한스 기벤라트처럼, 참혹하고 뻔한 현실을 깨닫기는 했으나 도약하지 못하고 그대로 수레바퀴 밑으로 끌려들어간 이도 있다)
헤세의 다른 작품들이, 그런 인간형들 중 한 명, 특히 구도하고 방황하며 끝내 깨닫는 자에 초점을 두어 이야기를 이끌어낸 것과 달리, 이 작품은 제목부터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지와 사랑이며 이성과 감성인 두 주인공을 나란히 배치한다. 이야기 전체의 흐름은 지적이고 학구적이며 자신을 초극하여 깨달음을 얻으려는 듯한 나르치스와 달리 (그 어머니를 닮아) 예술적이고 방랑가적 기질이 강한 골드문트가 그의 학생이자 친구가 되었다가 수도원에서 도망치고 애욕과 죽음에 눈뜨며 그 가운데 그림이나 조각 등을 통해 예술의 길을 걷는 과정을 그리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는 결코 나르치스를, 감정이 아닌 중심잡힌 지성을 잊지 않는다. 처음 “지와 사랑”을 읽었을 때, 사도 요한의 상을 조각하며 기억 속의 나르치스를 모델로 삼았던 골드문트가 나르치스를 다시 만났을 때, 서품을 받고 지금은 수도원장이 된 그의 이름이 요한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 순간의 감동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골드문트가 나르치스의 본질을 늘 제대로 보고 있었으며, 나르치스 역시 방향이 달랐을 뿐 자기 자신을 갈고닦는 구도의 길을 꾸준히 겪고 있었다는 것을 수많은 말이 아니라 저 한 장면으로 압축해 보여줄 수 있었던 작가의 능력이란.
그렇게,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수도원으로 돌아와 이곳 수도원 제단 등을 만드는 장인이 된다) 골드문트와, 꾸준히 자신의 길을 걸어 온 나르치스는 서로가 서로의 거울이 되고 스승이 된다. 어머니이자 젊은 시절 사랑했던 기사의 딸 뤼디아를 닮은 마리아 상을 조각한 뒤 다시 여행을 떠났던 골드문트가 돌아와 죽음과 마주했을 때, 그는 나르치스에게 “어머니”에 대해 말한다.
골드문트에게 있어 어머니의 기억은 거의 없다. 소년시절 그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부정당하다 시피 했으며,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열정을 따라 집을 나가버린 그 어머니의 “죄”를 씻게 하기 위해 아들을 수도원에 처넣었다. 대신 그가 길에서 만났던 모든 여인들, 그가 만나 사랑하고 결국 환멸을 느꼈던 여자들은 물론, 그가 출산을 도왔던 어느 부인에 이르기까지, 그가 만나고 사랑했던 여자들의 모든 모습이 그의, 어머니에 대한 어떤 이데아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성모 마리아인 동시에 최초의 어머니인 에바. 나르치스로 대변되는 이성의 세계와 골드문트로 대변되는 감정과 본능의 세계는 그렇게, 마리아이자 에바인 “어머니”라는 존재를 통해 하나로 나아갈 길을 찾는다. 그리고 죽어가는 골드문트는, 자신과 달리, 사랑과 본능과 열락의 어머니인 에바가 아닌 마리아에 대한 이데아만을 갖고 있는 나르치스에게 말한다.
그런데 나르치스, 자네는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생각인가? 자네한테는 어머니도 없잖아? 어머니가 없이는 사랑을 할 수 없는 법일세. 어머니가 안 계시면 죽을 수도 없어.
그것이, 처음에는 나르치스의 학생이었고, 그 다음에는 일탈자이자 방랑자, 부랑자였던 골드문트가 돌아와 나르치스에게 던진 “화두”다. 먼저 깨달은 자가 다음에 올 이에게 남기는 키워드. 나르치스 역시 다른 방식으로 같은 해답에 도달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책을 덮었다. 언제 읽어도, 이 소설만은 버릴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