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읽기-015] 설국(가와바타 야스나리) 민음사 세계문학 61

설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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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얼마 전 디자이너 앙드레 김이 타계한 날 밤, 고인에 대한 특집방송을 보던 중이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은 화려한 흰 옷으로 유명한 앙드레 김. 특집방송 속의 그는 흰색을, 눈의 순수함을, 아기사슴을 좋아한다고 말하며, 유명한 “설국”의 도입부, 바로 저 문장을 낭독했다.

긴 터널 너머에는 눈이 가득한 온천이, 환상과도 같은 고적하고 아름다운 세계가 있다. 말이 좋아 무용에 대한 글을 쓰고 있지 그나마도, 서양인의 무용을 직접 본 것이 아니요, 그렇다고 룸펜이라고 하기에는 여유로운, 인텔리이자 여행객인 시마무라는 고마코와의 기억을 좇아 이곳으로 찾아온다.

청순한 고마코는 원래 춤 선생을 따라 이 곳으로 왔던 소녀로, 춤 선생의 아들인 유키오가 병에 걸리자 그를 요양시키기 위해 게이샤가 된다. 시마무라는 유키오와 함께 돌아온 그의 연인 요코를 보며 고마코의 희생이 헛되다고 느끼지만, 동시에 헛된 일임에도 그렇게 한 고마코에게 점차 더 마음이 이끌린다. 고마코는 역시, 아내가 있고 1년에 한 번이나 이 고장에 오는 여행자일 뿐인 시마무라에게 연정을 느낀다.

초반에 유키오와 함께 이 고장으로 돌아온 요코는 청순하면서도 정열적인 일면이 있는 고마코와는 또 다른, 신비롭고 지순한 아름다움을 지닌 여자다. 하지만 그녀는 영화 상영창고 화재로 인해 자살과도 같은 죽음을 맞는다.

요약을 해놓고 보면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싶다. 기승전결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전체를 어느 소설의 일부로 놓아도, 또 어디를 어떻게 잘라도 이상하지 않을 장면과 장면들의 나열에 가깝다. 지극히 모던한 것인가 하면, 그러면서도 고전적이다. 동양의 신비에 가까운 느낌들, 눈이 가득한 환상적인 세계, 순결하고 깨끗한 그 세계와 게이샤들의 모습, 사랑하는 처녀, 정적이고 아름다운 춤, 손으로 짠 천을 눈에 바래 희게 만드는 모습, 나무로 깐 마루를 걸어오는 작은 발, 그런 것들이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다가온다. 분석을 하고 기승전결을 따질 것도 없이, 이미지로 다가오는 문학. 보기에 따라서는 기승전결도 없고 내용도 없으니 야오이가 아니냐는 말도 나올 수 있겠지만, 일본 근현대 문학에서 꽤 많은 영향을 받았던 식민지 시대의 문학 등등을 보더라도, 그 당신의 모더니즘, 이미지즘이 어떤 식으로 흘러갔을지 생각하고 또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고전적이면서도 모던한 이 느낌 뿐 아니라, 그 동양의 신비를 느끼게 하는 묘사와 묘사들이 결국은 노벨 문학상을 가져오게 한 것은 아닐까 싶긴 하지만.

단정한 수묵화같은 소설이다. 넓은 종이 가득, 꽃가지 하나 그려 눈이 소복한 산을 표현한 듯한. 소설이라기보다는 벽면 가득한 그림을 보는 듯한 쓸쓸하고 아득한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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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on Heyjin

Jeon Hey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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