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읽기-011] 연인(마르그리트 뒤라스) 민음사 세계문학 144

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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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닐 때 이 영화는 프랑스의 예술 에로영화 비슷한 것이었다. 영화를 보고 다시 소설을 보고 실망했다는 이들도 있었고, 아는 남자애 중에는 이 영화를 지금까지도 엄청나게 지겨운 에로영화인 줄 아는 녀석도 있다. 책을 다시 읽은 김에 다시 영화를 보니, 그당시에 봤음직한 영화 치고는 그 작은 집에서의 정사 장면이 좀 길긴 했다.

여튼 그때 이 소설은 한국에 번역되어 들어오기도 했다. 당연히 영화 포스터를 책 표지로 낀 채.

이혼하고 재혼했으며 세 아이들을 기르기 위해 프랑스어 교사 노릇을 하는 어머니는 난폭하고, 병적으로 장남에게 집착한다. 그러나 장남은 도박에 빠져 지내는,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할 만한 남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작은아들과 딸을 무시하고 장남에게 권위를 부여한다. 이 권위는, 폭력으로 이어진다. 어머니는 충동적이고, 무계획하며, 음울하다. 그러면서도 보상심리로 돈이 있을 때 아이들이 무언가를 사달라고 하면 바로 승낙하는 점도 있다. 딸아이에게 그 나이 소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금박 하이힐과 남성용 펠트 모자를 사주게 된 것도 그런 이유다.

금박 하이힐과 펠트 모자, 그리고 낡고 어머니가 입던 원피스를 입은 소녀는, 중국인 부호의 아들과 만난다. 섬세하고 연약하며 남자답지 못한. 부드럽고 상냥하고, 조금은 겁을 먹은 듯 백인 소녀에게 손을 내미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남자.

 “당신은 아무다 따라갈 수 있기 때문에 여기까지 날 따라온 것이군.” 그녀는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아직까지는 아무하고도 그 사람 방에까지 가본 적이 없노라고 말한다. 제발 나에게 아무 말도 말아 주세요. 그냥 늘 하던 것처럼, 당신이 독신자 아파트로 데려오는 다른 여자들을 다루듯이 행동해 주세요. 그녀가 그에게 애원한다. 제발 그런 식으로 대해 달라고.

하지만 현실에서, 사람들이 보기에 그녀는 그 중국 남자의 정부일 뿐이다. 그리고 이 나라의 풍습으로 그녀는 그와 결혼할 수 없고, 그녀에게는 그럴 마음도 없다. 그녀의 가족들, 그녀가 속한 세계도 마찬가지다. 남자는 몇 번이나 소녀의 가족들(어머니와 오빠들)과 식사하지만, 그녀의 가족들은 백인이 아닌 중국 남자를 공공연히 무시한다. 그것은 어찌 보면 자존심이기도 하고, 또 다르게 보면 오만방자함이기도 하다. 부유한 남자와 가난한 여자의 가족, 그리고 서양인이라는 우월감과 동양인에 대한 경멸감. 그리고 여자의 가족들, 특히 큰오빠는 남에게 그런 오만방자한 태도를 할 만한 위인이 아님에도 그리 한다. 소녀는 그에 대해 제지하지 않고, 그놈과 잤느냐는 말에도 부정한다.

후반부로 갈 수록 남자의 이야기는 흐릿해지고, 소녀의 가족들, 두 오빠들의 이야기가 위로 떠오른다. 큰오빠는 중년의 나이에, 작은오빠는 젊어서 죽었다. 소녀는 (어머니가 남편처럼 가장처럼 의지하고 싶어했으나 실제로는 무능한 폭군이 되어버린) 큰오빠를 두려워하고 경멸하며, 작은오빠를 사랑한다. 아이처럼 여기고 보호할 존재라고 생각한다. 어떤 면에서 소녀가, 몸은 남자를 사랑하며 동시에 마음으로는 작은오빠를 사랑한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그런데 죽음은 나에게서 떠나가지 않았다. 나는 큰오빠를 죽이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그를 죽이고 싶었고, 한 번만 딱 한 번만 그를 이기고 그가 죽는 것을 보고 싶었다. 어머니의 면전에서 그녀가 사랑하는 그 아들을 제거해버림으로써, 큰아들을 그렇게도 편애한 어머니를 벌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것은 작은오빠를, 때로는 내 아이처럼 여겨지는 그를 짓누르고 올라선 큰오빠의 생기 넘치는 삶에서 구해 주기 위해서였다. 햇빛을 가리고 있는 그 검은 베일에서, 큰오빠 마음대로 되는 그 법, 큰오빠 말이 곧 받인 그 야만적인 법에서 작은오빠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 법은 매일, 매 순간 작은오빠를 공포에 질리게 했다. 그 공포가 어느날 작은오빠의 심장에 닿아 그를 죽게 만들었다.

소녀가 어머니와 큰오빠를 전혀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 가족은 언제 분열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연약한 기반을 공유하고 있으며, 그 기저에는 일종의 광기 같은 것이 흐르고 있다.

 나의 삶은 아주 일찍부터 너무 늦어버렸다. 열여덟 살에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늦어버렸다. 열여덟 살과 스물다섯 살 사이에 내 얼굴은 전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변해갔다. 열여덟 살에 나는늙어 있었다.

소녀가 남자를 사로잡은 조숙하고 독특한 분위기는 그녀의 가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열여덟 살을 이미 늙어 있었다고 말하는 소녀의 어린시절과 소녀시절은 가족들 사이의 그 독특한 광기와 오빠에 대한 공포에 짓눌려 있다. 남자가 소녀를 사랑하게 된 것이 그 독특한 신비스러움 때문이었다면, 소녀가 남자의 손을 잡은 것은 이 미친 가족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일 것이다. 소녀가 정말로 남자를 사랑했을까. 책을 몇 번을 읽어도, 그 사랑은 속이 텅 빈 듯 공허하다. 마지막에 나이가 든 남자의 그 목소리가,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말이 더없이 슬프게 느껴지는 것도, 이것이 그에게는 그런 일생일대의 사랑이었을지 몰라노 소녀에게는, 그저 탈출구였고 하나의 지나가는 사랑이었으며 어쩌면, 작은오빠에 대한 리비도가 분출된 것 뿐인 게 아니었을까 싶어서. 그저 자유. 어린 소녀가 신은 성인 여성의 하이힐과, 어린 소녀가 쓰고 있는 성인 남성의 펠트 모자. 그저, 그 지옥에서 자유롭고 싶었던 것일 뿐인 소녀를 그는 맹목적으로 사랑해버린 것이 아닐까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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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on Hey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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