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읽기-009] 첫사랑(투르게네프) 세계문학전집 80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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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게네프에 대한 인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이것은 순전히 어렸을 때 읽은 세계위인전집 때문이다. 도스토예스프키와 톨스토이를 다루면서, 톨스토이는 마치 성자처럼(실제로 그렇지 않았다) 그려놓으면서 투르게네프는 완전 철없는 찌질이로 묘사해놓은 그 위인전집 때문에 나는 투르게네프의 소설을 읽어보겠다거나 하는 마음도 웬만해선 들지 않았다. 게다가 중학교에 가기 전에 읽은 “첫사랑”은 요약본이었다. 그때 읽었던 것은, 그냥 아침드라마보다 못한 막장드라마의 한 장면으로 머릿속에 남아 있다. “옆집 누나를 좋아했는데 그 누나는 바람둥이이다 못해 우리 아빠하고 놀아나는 완전 나쁜 계집애였어요” 이었던 것이다. 대체 왜 내가 젊은 여자가 이 남자 저 남자와의 사이에서 나쁜 년 노릇을 하다가 남자애네 아빠에게 맞는 이야기를 읽어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냥 더 찾아 읽지 않았다. (잘못된 요약이 이렇게 해롭다)

서른이 되어서야 제대로 읽은셈이다, 그런 관계로.

지금 생각해 보니 여자의 모습이라든가 여자의 사랑이라든가 하는 환영은 그 당시 나의 머릿속에 뚜렷한 윤곽으로 떠오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 내가 느끼는 모든 것에는 새롭고 말할 수 없이 감미롭고 여성적인 무언가에 대한 반의식적이고 부끄러운 예감이 숨어 있었다.
이러한 예감, 이러한 기대는 나의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그것을 들이마셨고, 그 감정은 피 속까지 스며들어 모든 혈관을 따라 흘렀다….. 그리고 그것은 곧 실현될 운명을 띠고 있었다.

어린 소년의 설렘과 두근거림, 사랑의 예감. 아직 지나이다를 만나기 전이었지만 이미 블라지미르의 마음은 이렇게 사춘기를 맞아 한껏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야말로 무언가, 거기 작은 파문만 일으키더라도 그 마음은 싹이 트고 피어올랐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서툰 마음을 꽃피게 한 사람은 바로 영락한 공작의 딸, 지나이다. 아름답고, 신분에 걸맞은 오만함을 지녔지만 정원에서 수많은 구애자들을 놀리는 것을 즐거워하는, 조금은 경박할지도 모르는 처녀. 그를 보고 사랑에 빠진 블라지미르의 증상은, 춘향전에서 이도령이 공자 왈 맹자 왈도 제대로 못 하고 헛소리 하다가 방자에게 한소리 듣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줄리어스 시저는 군인으로서 용맹이 뛰어난 사람이었다’라는 구절을 계속해서 열 번을 읽었지만,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책을 내던지고 말았다.

오오, 온화한 감정이여, 부드러운 음향이어. 감동 어린 영혼의 선량함과 평온함이여, 감미로운 첫사랑의 녹아나는 기쁨이여, 그대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대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현실은 시궁창, 그녀는 온갖 독신남들과 깔깔거리며 소년의 순정을 놀려대기 바쁘지만, 소년은 여전히 첫사랑으로 설렌다. 누구나 한 번은 겪었을 그 감정을 떠올리게 하는 섬세한 문장들이 흐르고, 블라지미르는 그를 놀리려 “나를 사랑한다면 거기서 뛰어내려 보라”는 지나이다의 말에 4미터 높이의 담벼락에서 뛰어내릴 만큼 무모해진다. 그녀의, 그녀가 이 많은 구애자들을 두고 정말로 사랑하고 있는 그녀의 연인을 노리고, 칼을 품고 그녀의 정원에 숨어 있을 만큼.

한편 병풍과도 같은, 제각각 성격은 있지만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지나이다의 구애자들에 대해 지나이다는 놀림으로 일관한다. 그녀는 자신의 구애자들을 경멸하며, 장담하듯 말한다.

“천만에요, 나는 내가 위에서 내려다보아야 하는 그런 남자를 사랑할 수 없어요. 내게는 나를 정복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요….. 그렇지만 그런 사람하고 맞닥뜨릴 것 같지는 않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죠! 난 누구의 손아귀에도 잡히지 않을 거예요, 절대로!”

물론 문학작품에서 이런 장담은, 그런 사람이 코 앞에 있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이미 이 시점에서 그녀는, 블라지미르의 아버지에게 반해버린 것으로 보이고.

블라지미르의 아버지는 젊고 매력적이며 강하고 냉철고 자존심 강한 남자, 블라지미르에게는 이상적인 남성이다. 그는 아직 젊었던 나이에 돈 때문에 10살 연상인 여성과 결혼하여 블라지미르를 낳았으며, 아내를 사랑하지 않고 아들에게도 그다지 애정을 품지 않은 듯 보인다. 또한 자기보다 연하의, 잘생기고 우아한 남자와 결혼한 어머니는 끊임없이 질투하고 흥분하고 화내며 블라지미르에게 집착한다.
아 버지는 내게 묘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아버지와 나의 관계도 이상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내 공부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고, 모욕을 주는 일도 전혀 없었다. 어디까지나 나의 자유를 존중해 주었고, 이런 표현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버지는 내게 정중하기까지 했다…… 단지 아버지는 나를 곁에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 나는 아버지를 좋아했고 또 아버지에게 매료되어 있었다. 내 눈에는 아버지가 전형적인 남성으로 보였던 것이다. 아아! 날 밀어내는 아버지의 손을 끊임없이 느끼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버지에게 아주 강한 애착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게 평생, 돈 때문에 결혼한 아내에게 시달리며 살아온 남자가(자기 발로 그녀에게 장가들었을 수도 있지만, 아직 결혼이 집안과 집안의 결합으로 생각되던 시대라는 점을 감안할 때 자신이 원해서 한 결혼은 아니라고 보인다) 매혹적인 소녀를 만난다. 물론 불륜이다. 하지만 남자에게도, 그리고 찌질한 놈들이 아니라 자기를 지배하고 휘두를 수 있는 강한 남자를 원하던 소녀에게도, 그것은 사랑이 된다.

어째서 그 젊은 처녀가, 그것도 공작의 딸이라는 어엿한 신분을 가진 여자가, 아버지에게 가정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 당돌하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하다못해 벨로브조로프에게라도 시집갈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그녀는 아버지에게서 대체 무엇을 바랐던 것일까? 자기의 장래가 파멸된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그렇다, 나는 생각했다. 그것이야말로 사랑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열정이라는 것이고 헌신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겐 자기희생도 감미로운 것이다” 언젠가 루쉰이 한 말이 문득 생각났다.
(중략)
그러나 나는 그 즉시 내가 얼마를 더 살더라도, 지나이다의 그 몸짓, 그 눈매, 그 미소를 결코 영원히 잊을 수는 없을 거라는 걸 느꼈다. 그녀의 모습, 뜻밖에 내 눈에 비친 그 새로운 모습은 내 기억 속에 영원히 각인되었다. 나는 하염없이 강물을 바라보며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도 몰랐다. ‘그 여자가 매를 맞다니’ 하고 나는 생각했다. ‘매를 맞다니…… 매를 맞다니……’

칼을 품고 기다렸던 지나이다의 연인이 아버지라는 사실에, 그리고 지나이다를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지나이다와 아버지의 밀회에서 지나이다의 팔을 아버지가 채찍으로 내리치고, 지나이다는 그 상처에 입을 맞추는 모습을 보며 소년은 충격을 받는다.

지난 한 달 동안에 나는 아주 늙어버렸다. 그리고 온갖 흥분과 고통으로 얼룩진 나의 사랑도, 이제야 겨우 가늠하 수 있고,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뭔가 분별해보려고 괜히 애쓰는, 낯설고 아름답지만 무서운 얼굴과도 같이 날 놀라게 한 미지의 다른 그 무언가에 비하면 어쩐지 아주 작고 유치하고 초라한 것 처럼 느껴졌다.

아버지는, “그런데 채찍은 어디에 떨어뜨렸어요?”라는 블라지미르의 질문에 “떨어뜨린 게 아니고 버렸어.”라고 대답한다. 그녀에 대한 사랑을 접고 돌아선 것은 소년 뿐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최후에, 뇌졸중으로 숨을 거두기 얼마 전, 그 자존심 강한 아버지의 진심이 드러난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가서 뭔가를 부탁하고 심지어 눈물까지 흘렸다고 한다. 이분이 바로 내 아버지였다! (중략)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어머니는 꽤 많은 돈을 모스크바로 보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 아버지의 마음을 인정할 수는 없지만 납득하듯, 어머니 역시도 아버지의 바람을 들어준다. 서글픈 결말이다. 이 모든 사랑의 갈등 속에서 블라지미르는 화인으로 찍은 듯한 첫사랑을 지나며 어른이 되어간다.

내 아들아, 여자의 사랑을 두려워해라. 그 행복, 그 독을 두려워해라……

독이 든 초콜릿처럼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첫사랑. 내가 좋아한 여자가 아버지와 불륜이더라는 치정극 내지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는 아니더라도, 사람에게는 어쩌면 저마다의 아프고 치명적인 사랑의 기억이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첫사랑은 소년의 첫사랑이 아니라, 일생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적 없었던 아버지의 첫사랑, 혹은 지나이다의 치명적인 첫사랑을 뜻하는 것일까. 예전에 읽었을 때와는 또 다르게, 절박하게 돌아가는 감정의 흐름들이 보였다. 하지만 지나이다는? 대체 이런 이야기에서 지나이다의 앞날에는 무엇이 있는 걸까. 그걸 생각하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지나이다야 어떻든, 나이도 먹은 아저씨가 대체 어쩌면 그렇게 무책임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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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on Hey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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