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읽기-005] 풀잎은 노래한다(도리스 레싱) 민음사 세계문학 167

풀잎은 노래한다
풀잎은 노래한다
풀잎은 노래한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어느 시골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먼저 보여주고, 메리와 리처드의 결혼부터 메리가 하인으로 부리던 흑인 원주민 모세에게 살해당할 때 까지의 과정을 보여주는 형태로 되어 있다. 초반부에 메리는 신경쇠약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여성으로, 쇠약해진 리처드는 동정받을 남편으로 보이며, 이웃인 찰스 슬래터는 부지런했던 리처드가 그렇게 쇠약해지고 폐인이 된 것은 모두 메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이야기는 이 시점에서, 메리의 소녀 시절로, 다시 처녀 시절로 빠른 속도로 넘어간다.

주정뱅이이자 늘 어머니와 싸우던 아버지, 자신에게 집착하는 어머니, 어린 시절을 보낸 상점가에 대한 혐오에 가까운 감정. 메리는 그와 같은 쓰라린 기억을 안은 채 공부를 하고 직장 여성이 된다. 회사에서 요즘 말로 치면 왕언니 노릇을 하며, 미혼 직장 여성을 위한 여성 회관에서 지내며 다른 젊은 아가씨들의 큰언니나 이모처럼 상담 상대가 되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나이에 맞지 않은 어린 티가 나는 옷을 입기도 하며 메리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그러나 남들과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살아간다. 그런 그녀의 인생에 변화가 나타난 것은 그녀가 서른 살이 되었을 무렵, 자신보다 어린 아가씨들도 줄줄이 결혼을 하고, 조금씩 나이가 들어가는데도 혼자 살고 있는 메리는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르게 된다.

‘훌륭한’ 국립학교 교육을 받았고 문화인으로서 극히 안락한 생활을 부끄럽지 않게 향유해 왔으며 저속한 소설책만을 읽은 덕분에 알아야 할 것은 전부 알고 있었던 삼십 세의 노처녀 메리, 그녀가 지금 완전히 균형을 잃어버리고 휘청거렸다. 자신에 대해서 아는 것이 너무나도 없었기에, 남 얘기 좋아하는 여자들이 그녀가 결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단순한 이유때문에 마구 휘청거렸던 것이다.

그러다가 메리는 리처드 터너를 만나게 되었다. 리처드가 아니더라도 그녀는 어찌 되었거나 남자를 만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메리가 만난 남자들 중에서 그녀를 매력적이고 특별한 존재로 대해 주었던 최초의 남자가 리처드였을 가능성이 높다. 메리는 자신을 매력적이고 특별한 존재로 여겨주기를 절실히 원했다. 사실상 지금까지 자신을 지탱해 온 힘이었다고 볼 수 있을 남자에 대한 우월감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그러한 존재로 자신을 대해 줄 사람이 나타나기를 절실히 원해 왔던 것이다.

그리고 메리는 그런 구설수를 피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을 존중해 주었다는 이유로 “결혼을 감당할 능력도 없고” “아이를 낳을 능력도 없지만” “아내와 자식이 있는, 농장에서의 홈 스위트 홈을 꿈꾸기만 하는”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무능한) 남자 리처드와 별 애정도 없이 결혼해 버린다. 리처드 역시 자신이 결혼하고 가정을 가질 능력도 없고 남의 돈으로 농장을 시작한, 빚만 많고 경제적으로 무력한 상황이면서도 도시에 나갔다가, 농부의 아내로는 어울리지 않는 메리를 보고 반해버리는 바람에 별 준비도 없이 결혼을 밀어부친다. 두 사람 모두, 감정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결혼을 감당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 채 시작된 결혼생활. 그러나 다들 언제나 누누히 말하듯 결혼은 현실이고, 비록 자립한 후에는 잘나가는 신여성이었다고 해도 어려서 가난한 집안 환경 때문에 고생했던 기억이 뼛속까지 공포로 남아있는 메리에게 있어 가난에 찌든 농장 생활은 지옥과도 같다. 하지만 집을 뛰쳐나와 예전의 직장으로 돌아가 보아도 이미 자신의 자리는 남아있지 않았다. 상황에 쫓겨서 한 이 결혼에 대해 자신이 정말로 결혼했다는 사실조차도 믿기 어려웠던 메리는, 이미 유부녀가 된 자신은 예전의 여성회관에서도 받아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유능하고 아름답던 자신은 사라지고, 거울 속에는 초라한 농부의 아내만이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하며 메리는 내면부터 망가지기 시작한다. 히스테리를 부리고, 하인들을 학대하고, 리처드가 말라리아에 걸린 사이에는 채찍을 들어 하인에게 상처를 입히기까지 한다. 마치,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의 어머니와 싸우고 때렸듯이. 그리고 자신을 불행으로 몰아넣으며 히스테리를 부린다. 마치 그녀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 처럼.

그렇게 부모의 어두운 부분을 이어가는 메리의 앞에 건장한 흑인 하인 모세가 나타난다.

 메리는 그가 일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냥 가만히 앉아있곤 했다. 탄탄하고 강건해 보이는 그의 체격에 그녀는 넋을 잃었다. 그 전 하인들이 입던 흰 반바지와 셔츠 몇 벌을 그에게 주었으나 하나같이 그에게는 너무 작아서 맞지 않았다. 그래서 등을 굽히고  풍로 청소를 하거나 빗질을 할 때면 근육질의 몸이 불거져서 옷을 찢어버릴 것만 같았다. (중략) 메리는 집 안에 있다가 그가 상체를 벗어젖히고 몸에 물을 뿌리는 것을 가끔 보았지만, 그가 목욕할 때는 아예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으려고 했다.

죄송합니다. 이 대목 보면서 “마님께선 왜 돌쇠에게만 쌀밥을 주시남요” 연상했다. 하지만 실제로도, 메리는 처음에는 모세를 거부하다가, 리처드가 자꾸만 하인들을 쫓아내는 메리에게 화를 내자 떠나려는 모세를 붙잡으려다 울음을 터뜨리기에 이른다.

 “부인이 있어달라고 했어요. 부인을 돕기 위해 있는 거예요. 만일 부인이 방해를 하면 나는 갑니다.”

큰 손이라든가, 울고 있는 메리를 침대에 눕히거나 물을 가져다 주고 병든 리처드를 돌보는 등, 모세의 행동은 메리에게 있어 또 다른 “어머니”이고, 동시에 수컷의 냄새를 강렬하게 풍기던 “아버지”이다. 아마도, 메리의 옷 시중을 드는 것으로 보아 둘의 관계는 리처드를 두고 선을 넘어섰을 것이며, 이 관계는 이웃이자 리처드의 목초지를 노리던 찰스 슬래터가 리처드의 병과 빚을 상기시키며 그의 농장을 인수하고 리처드를 농장의 관리인으로 두려 하는 시점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리처드와 메리가 요양을 떠난 사이 농장을 임시로 관리할, 영국에서 왔으며 아직 이 고장의 거친 때가 묻지 않은, 장차 플랜테이션 농업을 하고자 하는 청년 토니가 나타난다. 메리의 도시 신여성이던 시절을 연상하게 하는 청년 토니는 신경쇠약에 걸린, 그리고 마치 남편이나 주인처럼 방자하게 구는 모세의 태도에도 그러려니 하고 옷 시중까지 들게 하는 메리에 대해 일종의 기사도와 같은 친절을 보이고, 메리는 모세를 거부하고 내쫓는다. 그리고 모세는 메리를 살해한다. 분노, 배신감, 혹은 메리의 아버지가 그녀의 어머니에게 휘두른 폭력의 결정판처럼. 이 모든 과정에서 실제로 메리의 남편인 리처드는, 준비없이 결혼하고 몽상만 하며 손대는 일마다 마무리는 하나도 안 하며 대책없는 낙관을 부리면서도 자존심만 똘똘 뭉친, 무능 무기력한 인물일 뿐이다.

시작과 끝은 메리의 부모에서부터 시작되는 갈등과 폭력이었지만, 이는 다시 “혼자서 신여성으로 살아갈 수 있음에도 결혼 한번 잘못 했다가 뒤웅박 팔자” 나는 여성의 좌절감으로, 다시 남아프리카에서 벌어지는 흑백의 인종차별 및, 백인 농장주와 “백인 쓰레기” 사이의 계층차별까지 어우러지며 복잡한 잔혹극을 만들어낸다. 풀잎은 노래한다, 는 서정적인 제목이 아니라, 도리스 레싱이라는 작가 이름을 보고 떠올린 이미지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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