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다니는 직장에서는 5년차 이상인 분들께 직원복지 차원에서 1주일~10일 정도의 해외연수의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근데 저는, 전에 근무하던 기관까지 합치면 4년 반, 이곳에서는 3년 2개월 정도밖에 안되었죠. 운이 좋았습니다. 이번에 갈 순번이신 분들이 많이 포기하시기도 했고요. (날짜가 안맞아서, 혹은 여행지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렇게 순번이 밀려밀려, 어떻게 저하고, 저보다 늦게 오신 전산실, 학생처 선생님 두분까지는 그렇게 갈 수 있었는데, 가을차수부터는 5년차 이상이라는 규칙을 엄격하게 지킨다고 하시더라고요.
여튼.
이번에 다녀온 곳은 동유럽입니다. 동유럽 7박 9일. 단체할인가격-직장에서 지원해준 금액 의 차액은 무통장으로 입금하고(펀드를 조금 헐긴 했습니다만, 그 가격에 동유럽에 1주일 넘게 간다는건 불가능합니다. 돈도 쓸 때는 써야죠.) 공동경비를 계좌에 넣고, 필요한 돈을 환전했습니다. 가서 뭘 살지 대충 정해놓았기 때문에 계산은 딱 떨어졌어요. 나중에 돌아올 때 20유로(3만원) 정도만 카드로 그었고 나머지는 가져간 유로/거기서 다시 환전한 코루나로 다 해결했습니다. (유로는 센트까지 다 썼고, 코루나 동전 두세개 남았습니다)
이번 여행은 철저히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본받아(음?) 집에 굴러다니는 잠옷 티셔츠 정리를 겸하기로 했습니다. 본가에 가서 동생이 고등학교 다닐때 쓰던 큼직한 책가방이랑 아버지가 버리려고 두신 모자를 가져오고, 웃옷은 모두 버릴 옷들만 넣었습니다. 리눅스 티셔츠만 빼고요. 그렇게 옷가지를 우겨넣었더니 정말 책가방 하나 나왔습니다. 들고다닐 가방에는 여권과 현금 약간, 그리고 넷북이와 선글라스(안경 맞추는 김에 만오천원짜리 뿔테에 코팅렌즈 끼운것)와 디카를 넣었고, 아까의 책가방에는 각종 케이블과 드라이버(음?) 그리고 여권사본을 넣었습니다. 자, 여행준비 끝.
6월 21일. 아침 9시 20분에 직장 정문 앞에서 만나서 같이 가기로 했습니다. 9시에 가서 사무실에 잠깐 얼굴 비추고는 바로 내려왔어요. 인천공항에 갔더니 가이드님이 나와 계셨습니다(40대, 남자) 약간 깐깐한 듯 했지만 수속도 빨리 하도록 도와주시고, 괜찮은 분이라는 느낌이. 그 와중에 한명 두명 로밍하러 갔다 오다가 국장님이 사라지는 일도 있었지만, 다들 수속 빨리 하고 짐을 실었습니다. 다른 분들은 모두 캐리어. 혹은 캐리어에 작은 배낭이었는데 저만 책가방이더군요. 하지만 공항에서 폼나게 돌돌거리고 끌고 다니는 것이라면 몰라도, 인천공항에서 다시 집까지(여기 보도블록 사정이 꽤 안좋습니다) 끌고 가기에 캐리어는 참으로 부담스러운 물건이거든요. 그런데다 가방 자체의 무게도 엄청나고. 폼은 안나도 가방도 괜찮다 싶습니다.
출국수속을 마치고 면세점 순회의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저는 넷북이 꺼내서 놀까 하다가 면세점에서 구입한 물건들 찾으러 가시는 여쌤들을 따라갔는데, 음, 저는 솔직히 말해서 면세점은 여자들이 주로 가는 곳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남자가 거기서 살 거라고 해봐야 술담배 말고 있나요. 근데.
우와아.
아무래도 나 여자로서 인생을 좀 잘못 살고 있는게 아닐까.
라는 조금 심각한 고민이.
아니, 길 가는 여자들이 모두 손에 바리바리 면세점 봉투를 들고가는 것까지야 그렇다고 쳐도 말이죠, 우리 남자선생님들이 사모님 부탁을 받거나 등등 해서(안재홍 선생님은 엄선생님 부탁으로) 발음도 입에 안 붙는 온갖 화장품 메이커를 주워섬기며 면세점에서 물건을 찾기도 하고 새로 구입도 하는데 거의 경악스러웠습니다. 참고로 저는 다른 선생님들이 면세점에서 구입하신 것을 찾으시는 동안 뭐 빼놓고 가는게 없나 생각하다가.
약국에 가서 파스를 구입. 했습니다.
밖에서는 3천원하는 파스가 여기서 4천원하는 것에 피눈물이 나더군요. 미리 챙길걸. 하지만 그 파스, 여행 내내 유용하게 쓰였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굵은 발목이 더 두꺼워지도록 열심히 걸어다녔으니 말이죠.
로빠 겐조 옴므 향수를 한 병 사려고 봤는데 45달러 붙어 있네요. 이 가격이면 한국에서(지마켓이나 옥션에서) 사는 것 보다 비싸잖아! 싶어서 관뒀습니다.
12시 45분에 대한항공 KE905편으로 출국했습니다.
대한항공에서 인천-프라하 직항이 있긴 하지만(근데 여긴 인천공항인데 왜 도시명은 “서울”인겁니까? 공항코드는 ICN이지만.) 그건 하루 한대 정도이고 늘 만석. 그래서 올 때는 직항을 이용하지만 갈 때는 프랑크푸르트에서 환승을 한다고 합니다. 다른 짐은 책가방에 넣어 부쳤고, 갖고 있는 것은 넷북과 여권, 그리고 얇은 원서 한 권. (우리말로 된 책을 가져가면 한두시간이면 다 읽어버리니까요)
기내식은 두 번 나왔습니다. 처음 나온 것은 비빔밥과 비프스튜 중 고를 수 있었는데 비빔밥. 먹고 살짝 실망했어요. 뭐야 이거 하면서. 근데 이건 배부른 소리였다는 것을 돌아올때 확인할 수 있습니다. ㅎㅎㅎㅎ 돌아올때는 정말로, 주변에 비빔밥 비벼서 먹는 딸각거리는 소리밖에 안 났으니까요.
저녁밥으로 나온 것은 닭도리탕과 파스타 중 고를 수 있었는데 닭도리탕으로 먹었습니다. 옙, 저는 닭의 천적이니까요.
자, 지금 가는 곳은 프랑크푸르트.
프랑크푸르트 하면 떠오르는 것은 일단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입니다. (근데 저만 그런듯. 다른 분한테 물어보니 “후랑크 소세지”가 먼저 나오더군요. 역시 내 감각이 이상한건가……)
다들 아시겠지만 알름 산에서 자연에 묻혀 살던 하이디가 대도시인 프랑크푸르트에 와서 도시멀미+향수병을 겪지 않습니까.
또 하나 떠오르는 것은, 이건희 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선언.
그 유명한 말 있잖습니까. 쁘띠건희 아저씨의 명대사.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 마누라와 자식은 왜 나왔을까 생각했는데 홍라희 여사 사진 보고 괜히 부인이 무서워서 굳이 언급했구나 싶은 끄덕끄덕….. 을 날렸던….. 음…… 그 명대사를 날린 곳이 프랑크푸르트입니다. 뭐, 알프스의 소녀에 나오는 압도적인 도시 묘사(그 시대를 감안하더라도)와 이건희 회장 이미지 때문인지 프랑크푸르트는 엄청 큰 도시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그런데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프랑크푸르트는 인천보다는 몰라도 서울에 비해서 확실히 작아서. 그런데다 공항 규모도, 실제 규모는 밖에 나가봐야 알겠지만 그냥 봐도 “어째 그냥 딱 제주공항만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요. 밖에 나가면 꿈이 깨지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서 한국 시간으로 22일 새벽 1시, 프랑크푸르트 시간으로 06시(서머타임 적용)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일단 폰을 켜봤어요. 자동 로밍이 되니까 남친에게 문자(한통에 300원) 보냈습니다. 생각해보니 이 녀석 11시면 가서 자는 새나라의 공무원인 관계로 아마 자느라 못 받았을 듯 하네요.
안재홍 선생님의 담배 한보루를 대신 데리고 통과하는데 대한항공에서 받은 생수가 세관에 걸려서 압수당했습니다. 그냥 마실걸. 아까웠습니다. 잠깐 짬이 나서 주위를 돌아보는데 벌써 다들 면세점 궈궈. 저도 면세점에 가봤습니다. 인천공항에서 봤던 로빠 겐조 옴므 50ml가 35유로 붙어있네요. 음? 어쩌지? 한국 가격이랑 비슷할것 같은데? 고민하다가 그냥 관뒀습니다. 프라하는 더 쌀지도 모르니까요. 이성길 선생님은 밤에 마실 외제 음료수(;;;;)를 구입하셨습니다. 뭐 여기까지는 술 이야기는 그냥 장난입니다. 프라하 공항에서 보게되는 것에 비하면요. ^^ 그 이야기는 좀 뒤에.
면세점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정말로 면세점이 실속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붙어있는 가격에 환율을 생각하면 구입할 엄두가 안 나더군요. 돌아가서 삼성 보너스 포인트에 옥션 쿠폰 얹어서 사는 것이 더 나을 듯. 로빠 겐조 옴므 향수 외에는 만년필을 조금 보았습니다만, 환율 계산해보면 만년필 종류도 국내에서 사는 것과 크게 가격차이가 나지는 않고(인터넷 면세점으로 주문하면서 할인쿠폰을 왕창 받는다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일단 정식 수입 제품 쪽이 AS가 잘 됩니다. 그래서 만년필도 좀 OTL. 물론, 만년필은 고가 라인으로 가면 확실히 저렴해집니다. 제가 구입하려는게 금촉이 아닌 스텐촉, 20만원 미만 라인이라서 그렇죠. (가급적 10만원 내외, 라미는 5만원 내외) 저가라인 쪽은 국내에서 사는게 더 낫습니다. 그 가격대는 어차피 비슷한데다 국내에서 사면 잉크 카트리지도 잘 끼워주고 하거든요.
이성길, 안재홍 선생님이 어디 가셨나 했더니 흡연구역에서 담배 피우고 계셨네요. 흡연구역이 잘 되어 있었습니다. 유리벽으로 차단된 방에 공기청정시설이 갖추어져 있었고요.
기다리는 동안 창 밖을 보았습니다. 베를린 항공의 작은 비행기들도 보이고, 공항으로 부지런히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모노레일도 보입니다. 한국전이 화요일에 있는데 어떻게 볼 수 없으려나 하는 의논의 말들도 오가고요. 월드컵 결과를 다들 궁금해하고 계시는데, 넷북으로 접속해보고 싶어도 여기는 한국이 아니고 공항 탑승구 앞은 보안구역이라 어차피 인터넷이 될 곳도 아니고요.
한국에서 날아온 짐을 프라하행 항공기로 옮겨싣는 문제 때문인 듯? 예정 출발시각에서 30분 정도 늦어졌습니다. 좀 더 뒹굴뒹굴하며 기다리다가 시간이 되어 체코항공(CZECH airline) KE936편으로 으로 갈아탔습니다.
소요시간은 50분 정도. 김포공항에서 제주도 가는 기분이죠.
엷은 구름이 낀 상공 아래로. 끝없이 지평선이 보였습니다.
기내간식으로 초콜릿 크림이 든 파이반죽으로 빚은 듯한 빵과 주스를 받았는데 꽤 맛있었어요. 체코항공이 대한항공과 연계하여 하는 곳이라 들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스튜어디스들이 우리말로 인사를 하시고요. 물론 이쯤 되니 한국사람은 별로 안 보이고 기내 안내방송도 한국어/영어/일본어가 아니라 독일어/불어/영어로 나오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유럽에 왔다는 실감이 들었습니다.
프라하 도착. 여기 시각으로 오후 8시인데 아직 해가 떠 있습니다. 공항 지평선으로 해가 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자, 이제 도착해서 짐을 찾는데 말입니다. (후우)
전영 팀장님 짐을 찾아서 여는데…….
완전히 편의점 하나를 옮겨온 수준이었습니다. 냉매로 얼리고, 맥주도 얼려서 넣고, 온갖 안주거리에 심지어는 소주에 국장님 좋아하시는 홍초, 이과두주까지 나오는데. 아, 물론 이과두주에서 다들 OTL했죠. 맙소사입니다. 소주는 대체 몇병이 물을 건너 왔을지 아직 알 수도 없습니다. 다 좋은데, 박경진 선생님의 캐리어가 오다가 부서졌습니다. 하드케이스는 그래서 문제죠. 보상 처리가 되는 것 같아서, 이건 돌아가서 인천공항에서 새 케이스로 받기로 처리가 되었습니다. 그 동안에는 제 책가방에 폼으로 묶어왔던 다이소표 2천원짜리 짐벨트로 묶어서 다니시기로 했고요.
짐을 다 찾고 박경진 선생님 캐리어 문제도 해결하고 나서 밖으로 나와보니 어둑어둑하지만 하늘은 아직 환합니다. 오후 9시 50분 정도 되었는데 9시 20분에 해가 졌다고 합니다. 일단 기후는 비슷해도 우리보다 고위도니까요. 한국과 달리 보송보송한 공기였습니다.
호텔까지 오는 동안 버스가 후끈후끈해서 푹 잤습니다. 자면서 소설 소재로 쓸만한 꿈까지 꾸었을 정도예요. 일단 프라하….. 가 아니라 체코 제 2의 도시인 부르노로 이동합니다. 밤에 이동해 놓아야, 다음 날 바로 헝가리로 버스로 넘어가서 부다페스트 관광을 할 수 있으니까요.
호텔에 도착했어요. 여자가 총 다섯 명. 3인실에 한지연 팀장님 등등이 가셔서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습니다. 2인실에는 저하고 김순진 선생님이 묵게 되었거든요. 아무래도 2인실이 편할테니까, 연세가 있는 팀장님과 임산부인 김선생님이 같이 지내시는게 낫겠다 싶어서 가서 몇 번 말씀드렸는데, 나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지내라고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내일이라도 불편하시면 바로 말씀해주세요 하고 말씀드리고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방에 들어왔는데, 버릴 옷만 가득 넣어 온 짐에 정작 슬리퍼를 안 넣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김순진 선생님이 기내에서 주던 1회용 슬리퍼를 챙겨오신 덕에 살았습니다. 내일 구입할 곳이 있으면 구입해야지….. 하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 대한항공 기내 슬리퍼(1회용)은 여행의 마지막까지 저를 따라다니게 됩니다. 으흐흐흐흐흐…….













Entries (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