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버지는 훌륭한 교사였다. 술을 마시지도, 담배를 피우지도, 바람을 피우는 일도 없었다. 성실한 학교 선생님이고 퇴근 후에는 운동을 하셨으며, 성공한 제자들이 줄을 이어 찾아왔다. 젊으셨을 때 직접 지도했던 제자중에는 국가대표도 여럿 있었다. 내 인생에서 참으로 막막한 부분은 이 부분이었다. 내가 무어라 호소하고 항변해도, 아버지가 저런 분이다 보니 내 괴로움은 그냥 뭐, 철없는 어린애의 헛소리밖에는 되지 않는 것이었다. 다른 모든 일이야 그렇다고 쳐도, 다른 일들이야 다른 집 아버지들도 그렇게 편애하고, 그렇게 자식에게 잘못을 돌리며, 자식이 그런 일로 마음에 잔뜩 스크래치가 간 일 따위 알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고 쳐도. 나는 그때 정말로 죽기살기로, 죽고싶지 않아서, 죽을 힘을 다해서 아버지한테 SOS를 쳤다. 살고 싶어서. 지금의 내가, 작년의 내가 팔목을 가윗날로 찌르다가 말고 도움을 청하고 다음날 날 밝자마자 정신과 예약해서 달려갔던 것 처럼, 나는 그 와중에도 살고 싶었다. 하지만 공부 잘하는 애들은 모두 착한 모범생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계시던 우리 아버지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을 거다. 지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계시니까. 어떻게 인천에서, 각 중학교에서 전교 10등 안에 드는 애들을 싹쓸이해간 나머지 전교 꼴지가 모의고사를 보면 전국 20% 안에 너끈히 들어가던 고등학교에서 왕따 사건이, 폭력 사건이, 강간미수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아버지가 내린 결론은 심플하기 그지없었다. 그건 당하는 놈이 뭔가 문제가 있고 나쁜 거라고. 그 당하는 놈이 당신의 딸이라고 해도 가차없었다. 그렇게 가차없이 내치는 쪽이 주변에서 그렇게 존경받는 선생님이었기에, 그 괴로움에 대해 말해봤자 내 손해였다. 비참할 정도로.
토닥토닥 잘 밟고 잘 덮어놓은 상처를 자꾸 뒤엎으면, 언젠가 그 안에 남아있던 썩은 것들이 다 없어질까. 우리 아버지는 내년에 은퇴하신다. 아마 은퇴하실 때 까지 그 믿음은 변하지 않겠지. 모범교사였고, 자식에게 줄 책값은 없을지언정 어려운 학생을 솔선해서 돕고 촌지같은 것도 전혀 받지 않으셨으며, 제자들과 학부모들의 존경을 두루두루 받으셨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아버지가 다른 직업도 아닌 “교사”였다는 이유로 내게는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는 이유가 여전히 남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몇 번이나, 공부 잘 하는 애들이라고 그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 같느냐 물었지만 그분은 손톱만큼도 변하지 않았고, 나는 포기했다. 그냥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지금의 나는 다 컸고 어른이라서, 이제 “우리 집 어르신”께서 뭐라고 하건 내 인생에는 요만큼도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믿고 말하는 것 뿐이다. 어렸을 때는 부모가 자식의 인생에 대못을 박을 수도 있겠지만, 자식이 자란 뒤에는 힘의 중심도 바뀌는 법. 우리 아버지는 그때, 손바닥이 너덜거리도록 커터칼로 내리긋고 도로에 드러눕던 딸이, 정말로 울면서 나 좀 도와달라고,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을 거절했다. 정신과치료를 받게 해달라고 하자 비난했다. 낳아놓은 부모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딸에게 지금의 이 모든 일은 오로지 네 잘못이라고, 너같이 부모를 부끄럽게 하는 자식은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나았다고 말하는 순간, 나의 일부는 부모에게 살해당한 것과 같다고 말한다면 너무 심각한 이야기가 되는 걸까. 하지만 내게는 그랬다. 나는 그날 이후로 아버지에게 아무것도 기대하거나 부탁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렇게 1996년에 딸을 죽여버렸으니, 아마도 그 딸이 아버지 말 대로 네모 반듯한 세상에 각잡고 심심하게 살면서 효성스럽게 딸 노릇 하고 사는 꼴은 그다지 기대하시지 않는 것이 좋을 거다. 지금도, 내가 그냥 국으로 순종하는 딸이 되기를, 어디 선생하고 선이나 봐서 얌전히 시집이나 가기를, 그럴 것도 아니면 글 나부랑이 쓰는 것 제껴두고 고시공부 같은 것을 해 보기를 바라고 계시겠지만.
턱도없는 소리.
죽은 자식 ##만지기지, 그래봤자.
글쎄, 그때 나를 살려주었으면, 어떻게든 도와주려 했다면 아마도 지금의 나는 또 많이 바뀌어 있었을 거다. 그런 것이 사람의 운명을 가르는 변곡점이 되기도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지금도 그때 아버지의 눈을 떠올리는데, 머리카락은 가위로 잘리고 손에는 며칠 전 가위로 찍은 상처에 반창고가 덕지덕지하고, 울면서 아이들에게 두들겨 맞아서 엉망인 몰골로 학교에서 돌아온 딸네미는 보이지 않고 그저 쪽팔린다는, 인천 바닥은 넓지 않으니 아는 선생님들 통해서 당신 딸네미가 그렇게 두들겨 맞고 다니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저 쪽팔린다는 생각만 하신 그분은 그때 나를 한번 죽였다고 믿고 있다.
아무리 효성이 지극해도 죽은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를 할 수 없는 게 아닌가.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슨 말도 안 되는 기대를 아직도 품고 계시건 한 귀로 흘려버리는 것 뿐이다. 그냥 죽은 자식이거니. 내가 어떻게 살건 기대나 마셨으면.
그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자, 내가 우리 아버지와, 아버지의 복사판같은 여동생에게서 내 감정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다. 지나간 일로 인한 상처야 하루아침에 짠 하고 사라질 문제가 아니지만. 적어도 앞으로 무슨 말을 하건 그냥 흘려들으면 고작이고, 붙잡고 성질을 긁으면 그냥 두고 자리를 피하면 그만이다. 나도 살아야지. 언제까지 그걸 끌고 갈 거냐고 엄마는 속상해 하시지만, 엄마도 분명히 알고는 계실 거다. 그때 죽지 않은 것은 그야말로 부처님이 도우신 일이라고, 엄마도 늘 말씀하셨으니.
그러니, 그부분은 웬만하면 뒤집어 엎고 싶지 않다. 아직도, 우리 아버지가 또 가망없는 말씀을 시작하시는군 하고 웃어 넘기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은 순간은 적지 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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