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집 퀴어 이반지하 – 이반지하, 문학동네

이웃집 퀴어 이반지하

읽는 내내 샤프펜슬 끝으로 가슴 한복판을 긁어내는 듯한 따끔거림이 느껴졌다. “김소윤”으로 살았고 “김소윤”에 “갇혀” 살았던 이반지하. 여성이고 퀴어이며 폭력들을 이겨낸 사람. 용감한 생존자. 어쩌면 그가 중산층이 아니었다면, 명문대를 졸업하지 않았다면 그의 인생 어떤 부분은 말해질 수도 기록될 수도 없었을 지 모른다는 생각을 문득 하다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몇십 번은 족히 했다. 그는 ‘광대’이고 퀴어이며 성기 형태의 괴상한 모자를 쓰고 공연을 하는 예술가다. 그런 사람의 내면은 좀 더 강하고 불타오르는 것들로 차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한편으로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고, 자기 안으로 한없이 침잠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자신의 내밀한 상처에서부터, 미술 작품들을 짊어지고 서울의 비싼 주거비용을 감당하는 이야기까지. 그는 솔직한 욕망을 말하고, 그 욕망으로 인한 괴로움도 슬픔도 가감없이 이야기한다.

앞으로도 이런 요구를, 욕망을 멈출 생각은 없다. 절대로 검소한 태도를 갖지 않을 예정이다.

강제로 그의 인생에 매달려 있어 분리하고 싶은 것을 밀어내면서, 한편으로 그것들을 칼로 무 자르듯 분리하지는 못한 채로, 그는 수많은 것들을 발치에 매어단 채, 그는 여러 겹의 층위로 이루어진 인생의 여러 측면을 아프게 쓴다.

김소윤에는 ‘나’에 대한 여러 층위의 수치심이 자리잡고 있었다. 대학 때부터 젠더/퀴어 이슈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을 하는 (여성) 작가가 어떻게 취급되는지는 충분히 보고 경험했고, 그런 일에 ‘본명’을 쓴다는 것이 두려웠다. 또한 김소윤으로 태어나 저절로 맺어져버린 관계들을 나는 절실히 외면하고 싶었다.

그는 그 층위를 “수치심”이라고도 불렀지만, 그 층위들은 그를 이루는 수많은 요소들이다. “이반지하”가 “김소윤”의 “부캐”가 아니듯이. (아니, 애초에 나는 그 부캐라는 말도 무척 싫어한다. 남의 필명을 이야기하는데 부캐 운운하는 자신의 수많은 자아들을 무 자르듯 딱딱 분리하고 살 수 있는 모양이지? 그건 다른 이름으로 자아들을 분리하며 꾸역꾸역 살아내는 사람들에게는 실례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사노 요코의 “태어난 아이”를 여러 번 생각했다. 어떤 부분에선가 닿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막연하게 몇 번이나 연거푸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