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지붕 집의 마릴라 – 세라 매코이, 손희경, 출판사클

초록지붕집의 마릴라
초록지붕집의 마릴라
초록지붕집의 마릴라

빨간 머리 앤에서 마릴라는 길버트를 보고, 길버트가 그 아버지인 존 블라이스를 많이 닮았다고 말한다. 에이번리 마을 사람들은 예전에 마릴라가 존 블라이스가 서로 사귀었다고 생각했다. 한때 앤과 다이애나가 마시고 취해버렸던, 마릴라가 자랑하는 레드커런트 와인과, 마릴라가 소중히 여겼던 자수정 브로치에 대한 이야기도. 이 이야기는 원작에서 단편적으로 엿볼 수 있었던, 앤이 없던 시절의 마릴라 커스버트를 이야기한다.

어머니인 클라라와 아버지인 휴, 그리고 마릴라와 매슈와 스컹크라는 이름의 고양이가 살고 있는 집에, 임신한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어머니의 쌍둥이인 이지 이모가 찾아온다. 이곳을 떠나 세인트캐서린스에서 성공한 양재사인 이지 이모는 어머니와도, 또 에이번리 마을 사람들과도 많이 다르지만, 마릴라는 어머니와 똑같은 얼굴을 한 이모에게 곧 애정을 갖게 된다.

“어린 여자애는 꿈꿀 시간이 최대한 많아야 하는 법이지.”

어머니를 대신해 온갖 집안 살림을 도맡고, 아버지와 매슈를 위한 식사를 준비하던 마릴라는 이지가 자신의 자리를 빼앗는 게 아닐까 걱정하지만, 이지는 운율을 맞추는 것과 수수께끼, 상상으로 가득한 세계를 보여주는 한편, 마릴라가 알지 못했던 외가의 전통, 존슨 가의 레드커런트 와인 만드는 법을 알려주며 여성들에게 이어지는 전통과 유대를 알려준다. 이지가 이 집에 오며 바느질 모임에 따라가게 된 마릴라는, 그곳에서 수다스럽지만 손재주가 좋은 또래 친구인 레이철 화이트와 만나고, 학교에서 만난 존 블라이스의 관자놀이에 난 수두 자국에 설렘을 느낀다. 한편 이모에게 옷 짓는 법을 배워 곧 태어날 동생을 위한 아기 옷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마릴라를 둘러싼 삶은, 천진하고 평화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지 이모는 “아내의 자리에 안주”하지 않을, 야생 귀리 같은 사람으로 여겨져 마을에 한동안 돌아올 수 없었다. 캐나다의 흑인 남성들은 투표권을 갖게 되었지만, 여성들은 인종에 상관없이 투표권을 갖지 못했다. 매슈는 마을 무도회에서도 여자는 춤출 상대를 고를 수 없고, 남자가 청할 때 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말하며 “세상 일이 그래”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마릴라는 가족 중에서 처음으로 8학년까지 마치고 학교를 졸업하고 싶었지만, 동생이 사산되고 어머니도 숨을 거두며 마릴라는 영영 그럴 수 없게 된다. 이지는 마릴라를 데리고 세인트 캐서린스로 가려 하지만, 마릴라는 어머니의 유품인 자수정 브로치와 함께, 아버지와 매슈를 돌봐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집에 남는다.

조해너 앤드루스를 흠모하던 매슈는 조해너 앤드루스가 자신을 예의바르게 거절하는 것을 못 알아듣고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다가 모두의 면전에서 차이고 만다. 레이철은 열두 명의 아이를 낳고, 그 중 몇몇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 와중에도 레이철의 남편인 토머스 린드는 아이가 태어날 때 마다 피만 보면 기절을 한다. 존 블라이스와 마릴라는 서로 호감이 있지만, 존 블라이스는 자기 주장이 강하고 자신과 정치성향이 다른 마릴라와 서로 밀고 당길 뿐, 연인이 되진 못한다. 캐나다의 개혁당원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왕당파인 토리당을 지지하는 남자들과 진보적인 개혁당을 지지하는 남자들은 서로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갈등을 빚는다. 하지만 마릴라는 그 와중에도 에이번리 학교를 어떻게든 졸업하고, 남자들이 불화하여 모이는 동안, 종교나 정치성향과 무관하게 운영되는 여성들의 조직인 에이번리 부녀자 자선회를 이끌며 나름의 리더십을 발휘한다. 에이번리 부녀자 자선회가 모금한 돈은 애덕 수녀회를 통해, 미국에서 도망친 노예들을 구해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는 데 쓰인다. 그리고 클라라가 세상을 떠난 이후로 다시 이 마을에 오지 않았던 이지는 자신의 드레스샵을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19세기 초 미국에서 흑인 노예들의 탈출을 돕기 위해 결성된 비밀 조직)의 안전가옥 삼아 노예들을 피신시키는 일을 돕는다. 마을을 떠났다가 돌아온 존 블라이스는 아내를 데려왔고, 마릴라는 조금 상심하지만, 곧 결혼하지 않고 비혼으로 사는 삶의 행복 생각한다. 이지 이모도, 애덕 수녀회의 수녀들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도, 결혼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아가듯이.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남부의 여러 주들이 미국에 반기를 들었다. 미국의 남북전쟁이 코 앞까지 다가온 상황에서, 위험에 처한 이지는 흑인 집사로 위장한 동지이자 연인인 마틴과 함께 초록지붕 집에 찾아온다. 마릴라와 매슈는 충격을 받지만, 그들은 블라이스 부부의 도움을 받아 안전하게 이지와 마틴, 그리고 마틴의 손자들을 도피시킨다.

마릴라 커스버트라는 인물의 젊은 시절을 입체적으로 잘 형상화했다고 생각하지만, 오리지널이라면 독자의 몫으로 남겨둘 만한 것들까지 굳이 찾아내어 전부 채워넣는 것은, 흥미진진한 동인지에 가깝다. 나는 마릴라의 어머니 클라라와는 다른, 이 마을에서는 홀로 도드라졌고 결국 마을을 떠난 이지라는 캐릭터의 삶에 관심이 갔지만, 그러면서도 작가는 역시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여성들의 연대를 강조하고, 인종차별이나 페미니즘 문제에 대해 계속 생각하며 행동하는 이 소설 속의 마릴라는 21세기 버전의 해석, 특히 넷플릭스 드라마에 어느정도 기대는 면이 있다. 나는 이 버전의 해석이 꽤 마음에 들지만, 한편으로는 원작자인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생각했던 마릴라는 어땠을까를 계속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시대는 변하고, 해석 또한 변하는 법이다. 원래는 고아 출신이지만 공부해서 우등생이 되고, 학교 선생님이 되고, 사랑하는 사람과 맺어지는 앤은 상당히 진보적인 캐릭터였겠지만, 지금의 기준으로는 이견의 여지가 있는 것 처럼. 좋은 작품은 시대에 따라 계속 새롭게 해석되어야 하는 법이니까 이런 버전도 나름대로 괜찮을 것이다. 다만 이런 마릴라의 슬하에서 자란 “원작의 앤”은, 어떤 면에서는 마릴라보다 더 보수적인 여성으로 자라 버린 것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