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가난의 시대 – 김지선, 언유주얼

우아한 가난의 시대
우아한 가난의 시대
우아한 가난의 시대

제목만 보았을 때는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이 새로 나왔거나 속편이 나왔나 했다. 차분히 읽어보니 전에 이 글의 일부가 잡지에 실렸을 때, 그를 비판하는 글을 읽었던 적이 있었다. “도둑맞은 가난”이라는 말이 실려있던 그 비판이 이해가 갔다. 작년은 특히 모두에게 버거운 해였다. 특히 작년 봄은 잔인해서, 내 주변에도 쌀이 떨어지고 공과금을 내지 못한 이들이 있었다. 작년 어린이날에 코로나 때문에 어딜 나갈 수가 없어서 간단히 배달 음식들을 주문했다가, 한 시간 반만에 도착한 음식은 둘째치고, 누군가는 이 날에 아이와 함께 있어주지 못하고 배달을 하고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마음이 쓰여서 괴로웠다. 시발비용을 논하기 전에, 생존의 문제가 걸린 일들이 여기저기서 벌어졌다. 누군가에게는 다행히도 일시적인 고난이었고, 아이를 낳고 겨우 재취업을 했던 누군가는 코로나 때문에 몇 달도 못 채우고 일자리를 잃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콜센터나 쿠팡으로 일하러 가는 이들도 있었지만, 콜센터나 쿠팡에서도 전염병은 돌았다. 그게 작년의 일이고, 아직 회복하지 못한 이들은 많다.

물론 자신의 경제력 안에서, 가급적 자신의 취향에 맞는 것들을 골라내는 것, 좀 더 아름다운 것들을 생활 가까이에 두는 태도가 필요하다. 가난을 말하는 데 자격이 필요한가에 대한 의문도 어느정도 합당할 수 있다. 하지만 그냥 생활 속의 작은 기쁨들이나 작은 우아함, 그냥 소확행을 찾는 법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했어도 좋았을 것이다. 마치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도 좋아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마음에 차는 장기알을 찾아서 트위터에 인증샷을 올리시던 황현산 님 처럼. 그런 것들을 찾는 마음을 말하는데, 굳이 가난이라는 말을 훔쳐 쓸 필요가 있었을까.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는 엄살이었던 거고, 앞으로는 실제로 가난해질 확률이 너무나 높지. 그게 무서워.”

트렌드 드라마의 대사로 들어가도 어색하지 않을 말 앞에서, 엄살이라도 부릴 수 있는 게 다행이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것은 내가 다 알지 못하는 현실의 빈곤들이 얼마든지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농담처럼 말하는 시발비용을 지출하는 것조차 커다란 사치가 되는 삶들이. 삶에서 부릴 수 있는 크고작은 낭비들이 삶을 풍성하게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장기적인 전망이 어두우니 지금 당장의 행복을 찾는 게 중요하다는 것도 맞는 말이지만, 현실에는 여전히 혹시라도 돈이 많이 드는 제왕절개를 하게 될까봐 그 누구 코에도 못 붙일 것 같은 고운맘카드를 한푼도 못 쓰고 버티는 사람들이, 쌀이 떨어지는 이들이 존재한다. 지난 겨울 아이들 손을 잡고 동사무소에, 아이가 있는 집에 보태주면 좋겠다고 얼마간을 기부하러 갔을 때, 동사무소 앞에는 “동사하신 분의 사망신고”에 대한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그래서 쌀이 떨어져도 장미 한 송이를 사는 마음, 문정희 시인이 바퀴벌레가 우글거리는 뉴욕의 작은 아파트에서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향수에 리본을 매달아 화장실에 걸어놓았다는 이야기들을 이해하는 것과 별개로, 시발비용과 탕진잼, 브리야 사바랭의 글을 경전처럼 삼는 미식, 폭식의 시대, 그리고 작은 집에 들여놓는 우아하고 미니멀한 가구에 대한 이야기들 앞에 “우아한 가난”이라는 말이 붙는 것에 대해 복잡한 마음이 든다. 후자는 가난하지도, 우아하지도, 그다지 썩 아름답지도 않다. 외식 대신 유기농 식재료를 선택해 요리하는 삶에는 경제적인 여유와 시간적인 여유, 두가지 모두 필요하다. 회사를 그만둬서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그쪽을 선택했다고 말한다면, 매일 회사에서 밤 늦게까지 초과근무를 하면서도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하는 이들의 삶은 대체 무엇이라 불러야 좋을까 모르겠다. 당장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는 안목과 손에 쥐인 생활비 사이에 괴리가 있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문화자본을 가질 수 있었던 이들, 그리고 제법 큰 회사에서 꾸준히 월급을 받을 수 있었던 이들이 말하는 “가난”이나 “결핍”에 대해.

솔직히 나는, 책을 읽는 내내 부끄러웠다. “대체 왜 이렇게 말하는 거지?”라는 의문 속에서, 그럼에도 살면서 좀 더 마음에 차는 것들, 책을 읽고 전시회를 보러 가는 것을 선택해 왔던, 선택할 수 있었던 생활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문화적인 일에 종사하고 있어 책을 사는 것이 지출이 아니라 집필에 필요한 원자재 비용이 아니냐고 농담을 하고, 그런 것들을 선택할 만큼의 여유는 있지만, 읽는 내내 내가 아는 이들의 가난과 내가 미처 알지 못하지만 짐작하는 가난들이 계속 떠올라서.

기본소득이라도 제대로 확립된 다음에, 보편적으로 사람의 생명을 중요시하고 최저임금을 보장하는 노동환경이 만들어진 다음에, 아이를 낳아놓고 나몰라라 하는 남자들이 제대로 양육비라도 지불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진 다음에, 그 다음에야 작은 사치나 작은 우아함에, 감히 가난이라는 말을 붙여도 되는 게 아닐까. 바로 며칠 전에도 젊은 사람이 항만에서 일하다가 컨테이너에 깔려 죽었다. 내가 아는 사람도 비 오는 날 배달 오토바이를 몰고 달리며 이런저런 사고를 겪고 있어서, 어지간히 아프지 않으면 비가 오는 날에는 선뜻 음식을 배달시키지 못한다. 미혼모를 위한 정책들이 있어도, 그 정책을 몰라서 지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가난이라는 말이 너무 쉽게 쓰여지면, 때로는 읽는 사람이 수치스러워진다. 특히 이런 시대에는. 책이 나쁘다기보다는, 제목이 너무 나빴다. 어느정도 공감하며 읽다가도, 잠시 책을 덮어놓는 순간마다 사람이 낯이 확 뜨거워졌다. 왜, 멀쩡한 책이 나오는 과정에서 이 제목을 한 번 걸러내지 못했을까. 왜. 차라리 더 욕망에 충실한 글로, 제목도 좀 더 욕망에 적극적이었으면 나았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