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책의 마지막에 실린 연표에는 1980년대 이후를 “인쇄의 사망이 선포되었다”고 표현했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은 일은 키보드로 할 지언정 여전히 펜을 쓴다. 만년필을 쓰기도 하고, 병잉크를 색색으로 모으기도 한다. 캘리그래피가 유행하기도 했다. 그림은 아이패드로 그릴 수 있는 시대에, 수채화를 배우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수채화를 배우다가 수제 물감을 직구하거나 아예 안료를 사서 수제물감을 만드는 분들도 계신다. “사람들이 손으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싶어하는” 마음은, 어떤 이들에게는 직접 잉크를 만드는 일로 이어지기도 하는 모양이다.
잉크에 대해 설명하기 앞서, 이 책은 아주 간결한 정의를 내놓는다.
잉크는 색재에 액체를 더한 것이다.
여기서 액체는 전색제(vehicle : 일만적으로 물, 인쇄잉크는 기름, 목판인쇄에는 겔, 유성잉크에는 알코올)이며, 결합제(binder)는 액체와 색을 결합시키는 물질, 아라비아고무 같은 것을 말한다. 여기에 잉크의 농도를 변화시켜 걸쭉하게 만들거나, 잉크에 곰팡이가 피지 않게 하는 첨가제(additive)가 들어간다. 소금이나 식초, 금속, 동록유, 정향 등이 쓰인다. 이 페이지를 보니 수제물감을 만든다는 분들의 블로그들이 떠올랐다. 결국 수제잉크도 수제물감도 천연염료와 이어지는 것들이니까, 비슷한 계열의 이야기일 것이다.
이 책에서는 여러 재료로 잉크를 만드는 법을 상당히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기본적인 방식은 다음과 같다.
- 잉크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도구와 그릇들을 열탕소독한다.
- 덩어리진 재료는 으깨서, 뿌리나 잎이라면 그대로 분량의 물과 섞는다. (장과류는 열매 2컵에 물 120mL, 건조 안료라면 재료 1/4컵에 물 650mL에 아라비아고무 2큰술, 식물 재료라면 1컵에 물 480mL를 넣으라고 한다) 식초 2큰술과 소금 1큰술을 넣고 저어주면서 2시간 정도 끓인다.
- 커피필터로 여과한다.
- 60mL 잉크병 하나당 아라비아고무 10방울(분리되지 않도록)과 동록유 몇 방울 혹은 통정향 1개(곰팡이 피지 않도록)를 넣는다.
이렇게 만들어진 잉크는 변화한다. 녹을 이용해 만든 잉크는 시간에 따라 색이 변화하기도 한다. 저자는 이를 두고 “잉크는 살아 있다”고도 말했다. 이 책에서는 다양한 소재로 잉크를 만드는 법을 소개했지만, 가장 무난한 것은 카본블랙이다. 저자는 포도넝쿨이나 버드나무 잔가지를 알토이즈 틴케이스에 넣어, 불 속에 1시간 가량 넣어두는 방식으로 목탄을 만들고, 그 목탄을 이용해 카본블랙 잉크를 만드는 법도 설명한다. 또 중세에 널리 사용된 참나무혹 잉크에 대해서도 소개했다. 흑호두로 갈색을, 녹슨 구리로 푸른색을, 카레의 재료인 강황으로 노란색 잉크를 만드는 과정을 읽고 있다 보면 주방에서 아이들과 직접 만들어 보고 싶은데, 만들고 나서 뒷정리할 자신이 없어서 시도해 보진 못할 것 같다. 하지만 참나무혹 수제 잉크라니, 종이를 파고 드는 성질이 있어서 가죽같은 데 써야 한다고는 하지만, 읽고 쓰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로망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