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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1] 빛이 있는 동안

“빛이 있는 동안”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유작 단편집으로, 발표되고 수십 년 동안 책으로 묶이지 않은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국내에서는 황금가지에서 처음 들여왔다.)

일단 “크리스마스의 모험”“바그다드 궤짝의 수수께끼”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단편, “크리스마스 푸딩의 모험”과 “스페인 궤짝의 수수께기”의 초기 버전이다. 포와로가 나오고, 이야기 자체는 짧지만 재미있다. 이미 읽은 이야기의 초기 단계의 버전을 보는 재미, 거장도 초기 발표 버전에서 개작을 하면서 더 이야기를 흥미롭게 만들어나가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물론 개작 후의 버전을 더 좋아하기 때문에, 이들 두 작품에 대해서는 딱 그만큼의 흥미를 느꼈다.

“외로운 섬”은 오 헨리의 단편을 떠올리게 하는 짧고 낭만적인 이야기다. 전에 이 책을 읽었음에도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좋은 이야기지만 내게는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다.

다른 작품들은 흥미진진하다. “여배우”는 사기꾼에게 협박을 받는 여배우가 닮은 여배우와 약물, 화장의 도움을 받아 눈속임으로 사기꾼을 속여 내쫓는 이야기다. 간단해 보이지만, 이야기의 시점과 구도는 책을 읽는 독자를 상정한 것이 아니다. 무대를 바라보는 객석을 상정하고 있는 느낌이다. 지금은 흔한 트릭이지만, 그럼에도 연극으로 보면 이 효과가 극대화될 것이다. “맨 섬의 황금”은 지역의 미스터리 투어를 위해(그 시절에!!!) 만들어진 이야기인데, 이 책에 수록된 이야기 중 가장 현대적이다. 읽고 있으면 “명탐정 코난”의 주제가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옛날 작품인데도 속도나 장면전환 면에서 그런 현대적인 만화의 리듬이 느껴진다. “빛이 있는 동안”은 알프레드 테니슨의 “이녹 아든”의 변주로, 디어드리가 담배 농장에서 마주친 전 남편이 그곳에서 쓰는 이름은 대놓고 “아덴”이다. 디어드리는 빛과 어둠, 즉 현 남편이자 부유한 사업가이고 담배농장을 소유한 조지 크로우저와 전쟁터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졌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담배농장 노동자가 된 아덴, 조지가 준 다이아몬드와 담배농장의 어둠 사이에서 갈등한다. 이야기 전반에서 담뱃잎의 독한 냄새가 강렬한 후각적 심상으로 다가오는 한편, “드비어스의 다이아몬드”에서 세라 크루의 다이아몬드, 드비어스의 다이아몬드 결혼반지 마케팅, 그리고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등을 연상하며 읽었다.

“꿈의 집”. 존 시그레이브라는 남자가 꾸는, 높은 언덕 위 하얀 집에 대한 꿈과, 현실의 여성인 앨러그라 케어의 관계가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고딕 호러의 분위기를 풍기지만, 그보다는 당대에는 최신의 이론이었던 정신분석의 영향을 생각하게 한다. 동양의 꿈 해몽에서 집은 종종 자기 자신을 나타낸다. 서양에서도 마찬가지다.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을 출간한 것은 애거서 크리스티가 아직 소녀였던 1900년의 일이며, 칼 융 역시 꿈을 분석했다. 이런 사실들이 이 이야기에 실험적으로 반영되었으리라 짐작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 것이다. 꿈 속의 집은 존의 동경의 대상이자 두려움의 대상이다. 존이 앨러그라를 사모하고, 앨러그라와 그 꿈 속의 집을 연관지으며, 집의 내부를 알고 싶어하지만(앨러그라와 더 친밀한 관계가 되고 싶지만), 그녀 집안의 정신병력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다. 꿈 속의 집에서 이사를 나가는 검은 마차와 앨러그라의 죽음이 교차되는 것은 전형적인 꿈 해몽 이야기다. 존은 앨러그라의 죽음 이후 열병을 앓고, 트랜스 상태에 빠진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꿈속의 집으로 들어가고(광기에 사로잡히고) 완벽하고 충만한 기쁨을 느낀다. 유난히 섬세하고 감수성이 풍부했던 존이 동경하고 두려워했던 것은 결국 광기였으며, 그와 하나가 됨으로써(그 집에 들어감) 그는 마침내 원하던 곳에 도달한다.

“칼날”의 두 주인공 중 한 명의 이름이 비비안 리여서, 읽는 내내 그 인물의 이미지가 배우 비비안 리의 이미지로 떠올랐다. 다만 이 소설이 쓰여진 시기는 1927년이어서, 배우 비비안 리가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전이다. 몸가짐이 바르고 영국적인 서른 두살의 숙녀(당시로서는 노처녀)인 클레어가 친구이자 연심을 품고 있던 제럴드 리 경의 젊은 아내 비비안을 두고 질투와 도덕적 우월감, 그리고 그녀의 죽음 이후 죄책감으로 파멸하는 이야기다. 말하자면 비비안을 치려던 칼날이 결국 자신을 치게 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 두 여성은 말하자면 연적이지만, 남자는 그저 사건전개용 아이템일 뿐, 클레어와 비비안 사이의 기류가 집요하다. 읽다 보면 클레어는 비비안을 파멸시키고 제럴드와 결혼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비비안의 약점을 잡고 통제를 하는 것 자체에 기쁨을 느끼며, 그녀가 자신의 손을 벗어나려 하자 협박하다가, 비비안이 죽음으로써 그 협박에서 벗어나자 스스로 파멸한다. 클레어의 감정이 정말로 격렬하게 쏠렸던 것은, 제럴드가 아니라 비비안이 아니었나.

“벽 속에서”는 예전에 읽었을 때는 조금 난해하게 느꼈고, 읽으면서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 속 세계에 잘못 빠진 사랑과 질투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우유처럼 하얀 벽 속, 비단처럼 부드러운 커튼 속, 수정처럼 맑은 바다속에 잠긴 금빛 사과”라는 수수께끼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야 앞뒤가 제대로 맞춰졌다. 앨런 에버러드는 재능있는 화가였고, 과거에 초상화를 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결말 직전까지 그는 원하지 않는 초상화들을 그리지 않았지만, 작품 서두에서 그는 사교계의 초상화가로 설명된다. 즉 이 이야기는 과거의 어느 시점에 대한 것이며, 앨런 에버러드의 작품 세계가 어떤 일을 계기로 변화했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이야기의 삼각관계는 이소벨과 제인이 앨런을 사이에 둔 듯 보이며, 앨런 역시 제인이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만 그리게 하려고, 이소벨이 경제적인 불만을 갖지 않게 하려 이소벨에게 돈을 보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앨런의 관점이다. 이소벨은 앨런을 사랑하고, 앨런은 이소벨을 사랑하지만 성공을 요구하는 사교계의 명사인 아내에게 다소 지쳐 있다. 대신 그는 헌신적인 제인에게서 꿈과 환상, 이상을 보았다. 실상 제인은 주변 사람 모두에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같은 존재이고, 제인의 헌신은 이소벨을 향해 있는데도. 삼각관계의 행방이 무엇이든, 이 이야기의 중심은 두 여성이 아닌 앨런이다. 소피가 낸 수수께끼에서 달걀 속 난황이 금빛 사과로 묘사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금 사과는 질투의 여신 에리스가 펠레우스와 테티스의 혼인 잔치에 던져, 아테나와 헤라, 아프로디테 사이의 분쟁을 일으킨 물건이다. 이 황금 사과를 앨런과 이소벨이 함께 붙잡은 것은, 제인이 끼어 있는 삼각관계에서 이들 부부의 단단한 파트너 관계로 관계가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비단처럼 부드러운 커튼과 수정처럼 맑은 바다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연상하게 한다. 파리스는 현실(헤라의 ‘권력’, 아테나의 ‘승리’)을 버리고 이상(아프로디테의 ‘사랑’)을 선택했고, 그 결과로 트로이 전쟁에 휘말리며, 세계의 질서는 재편된다. 하지만 이소벨은 사랑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는 성공을 함께 이야기하는 현실적인 사람이며, 사랑은 알에서 깨어나 이상의 세계로 날아가려는 앨런을 현실의 세계(알)에 가두는 덫이다. 마지막에 제인의 초상화가 빛을 잃는 것은, 그가 이상을 버리고 현실적인 성공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음을 말하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