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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공주의 우아하고 파괴적인 성인식 – 홍지운, 안전가옥

호랑공주의 우아하고 파괴적인 성인식
호랑공주의 우아하고 파괴적인 성인식

작가 홍지운, 작가 dcdc를 좋아한다. 그의 소설을 좋아하고, 같이 만나서 이야기를 할 때의 dcdc도 좋아한다. 그래서 이번 책을 읽으면서는 조금 놀랐다. 우와, 그 dcdc님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보수적인 걸 썼지. 아니, 작가란 원래 장르별로 필명을 나누어서 쓰기도 하는 사람들이니까, 필명이 바뀐 영향인가.

물론 제목도, 표지도 펑키하고 강력하고 파괴적이다. 등장인물들이나 이들의 인간관계는 또 어떤가. 가상의 대한제국은 여성 황제들을 배출했고. 이들 중 혜경공주 광종은 독립군의 영웅이었으며, 선황인 산종은 군사정권 당시 친군부파 황실에 맞선, 민주화 진영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황제 혜종은 이야기 전체에서 무척 멋진 여성으로 나온다. 주인공인 호랑은 다정하며 의리가 있고 적당히 반항적이면서도 학습능력은 있고, 무엇보다도 스쿨밴드를 하며 약자를 위해 싸우는, 옛날같으면 소년만화의 정석적 남자주인공에게 흔히 부여했을 속성을 다 갖춘 소녀. 같이 밴드를 하고, 종가구 궁궐 복원 프로젝트를 반대하는 데 쫓아다니는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다. 멀쩡하고 성적 우수해 보이지만 호랑보다 더 잘 싸우는 파이터인 라라나, 둘의 폭주를 어느정도 말리는 역할인 남학생 해민은 상대적으로 평범한 주인공 친구 1 정도로 보이지만(그리고 이럴 때 남학생인 해민은  여성인 주인공과 유사연애 관계를 형성하기 쉽지만), 황실 무도회에서 라라는 턱시도를 입고 호랑의 파트너가 되고, 해민은 좋아하는 남자 선배와 함께 참석한다. 무척 일을 잘 하는 혜종의 비서인 유나는 황제 폐하를 사모하고 있고, 이익태의 수하 콤비는 이야기의 결말 부분에서 ‘서로에게 충직’하기로 하는 것으로 나온다. 어떤 의미에서 “좋은 헤테로는 죽은 헤테로 뿐”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이성간에 좋아서 죽고 못 사는 사람은 호랑의 부모(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다) 말고는 나오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2020년 현재 한국에서 종이책으로 읽을 수 있는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 헤테로 말고는 관계가 안 나오다시피 하는 것들이 적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이런 구도도 나쁘진 않다.) 한편 이야기의 전형적 악역인 이익태와 그의 일당들의 행각은 문자 그대로 구역질나는 “중년 알탕연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알고보니 내게 출생의 비밀이 있고, 사실은 내가 공주였다, 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도 하나의 작은 장르로 분류할 수 있을 만큼 보수적이고 전형적이다. 미운오리새끼가 백조가 되듯이, 평범하던 주인공이 드레스를 입고 성장(중의적으로)을 하고 데뷔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인기가 있다. 물론 이 이야기에서 호랑은 순순히 드레스를 입기는 하지만, 그 위에 투쟁 조끼를 입고 나타난다. 하지만 이런 “출생의 비밀을 지닌 공주 이야기”에서 드러나는 주인공의 성장은, 주인공이 드레스를 입고 사교계에 데뷔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 이야기가 말하는 것은 펑크로 세계정복을 하겠다며 입헌군주제 폐지를 외치던 호랑이 정치의 언어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입헌군주제의 일부가 되는 것, 그래서 사람들을 위해 일하면서도 사람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헌군주제를 폐지하는 것에 대해 논의할 수 있을 때 까지 사람들을 지킬 것을 말하며 성장하는 이야기, 세상에 받아들여지는 이야기다. 그런 점에서 이야기는, 청소년의 성장담을 그리는 영어덜트의 전형인 동시에, 한없이 보수적이다. 읽으면서 “dcdc작가가 그리는 대한제국의 공주라면 중후반부에서 좀 더 파괴적으로 혁명 투쟁을 외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에 비하면 무척 보수적이고 안정적인 결말이다. 그래서 마지막 부분에서 “생각한 것 만큼 파격적이진 않았다”며 피식피식 웃으면서도, 한편으로 생각했다. 내가 알던 그 작가는 무언가(아니, 김꽃비 배우님…..)를 동경하는 소년같았는데, 제자들이 잔뜩 생기더니 이제 완전히 어른이 되셨군, 하고서. 보수적인 결말도, 그가 결말부에서는 딱 자신의 제자들의 나이일 호랑과 그 일당들을 비추는 무척 애정어린 시각도. 주인공이 아니라 작가의 성장이 보였다.

PS) 이 작가님 작품 중에 처음으로, 메이저하게 영상화가 가능할 만한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 같다. 아마 기획단계부터 그런 것(화면에 잡히는 것)을 고려하고 작업한 듯한 부분들이 꽤 보인다.

PS2) 뒷이야기가 반드시 있을 만 한 이야기인데. 몇년 뒤에 호랑황제의 이야기도 나오는 건가?

PS3) 그나저나 안전가옥에서 재미있는 책들이 많이 나오네. 다음번에 내가 갖고 있는 이야기 중에 SF라 하기에는 조금 미묘한 것을 안전가옥에 한번 상의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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