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 좀 합시다 – 김휘빈

계약 좀 합시다
계약 좀 합시다
계약 좀 합시다

김휘빈 작가님의 신작. 현대물 로맨스. 크고 아름답고(…..) 몸 좋고 섹스 잘 하는데 조신하고 신사적이고 요리도 잘 하는 직장상사와의 사내연애+계약연애. 게다가 주인공인 장아린 대리의 계약연애 상대인 유후영은 대표님이자 재벌가 아들. 와, 이렇게까지 한국 막장드라마 풍의 셋팅으로 시작할 수가 있나. 싶었는데, 과연 무엇이든 한번 꼬아서 다시 셋팅하시는 김휘빈 작가님 답게.

통상의 막장드라마가 아니라 그냥 현실막장 가족관계를 보여준다.

특히 처음에는 아린의 성격이 ‘통통 튀는’ 정도가 아니라 약간 상담이 필요한 상태가 아닌가 생각했다. 이건 댓글에서 이야기가 나오던 여주가 말이 너무 거칠다거나 한 것과는 조금 다른 문제인데, 얘에게서 요시나가 후미의 “사랑해야 하는 딸들”의 두 번째 에피소드, 자기 대학 교수를 추행하는 여대생이 연상되었기 때문이었다. 좋게 대우받으며 산 티가 나지 않는 것, 연애에서도 착취당했던 듯한 느낌. 좋은 대학을 나왔다고 하니 공부는 잘 했던 것 같고 회사에서도 일은 꽤 잘 하는 것 같은데, 말이나 일상적인 행동이 영 어린애같은 것. 그리고 이런 디테일한 요소들은 그녀가 잘 살다가 집이 쫄딱 망한 가난한 집 장녀로서, 어머니와 동생들에게 이중구속 및 가스라이팅을 당하며 집안의 검은 양 취급을 당하는 동시에 등에 빨대가 꽂혀 착취당하던 정황을 더욱 현실감있게 보여준다. 미성년자일 때 부모가 자기 이름으로 대출을 받았고, 이후 졸업하고 취직해서도 자기 몫으로 무엇하나 갖지 못한 채 벌어서 집에다 바치기만 계속하던 아린에게, 가족들은 후영과의 계약연애를 통해 물질적으로 뜯어낼 것을 요구하고, 심지어는 후영이 아린에게 사준 것을 팔아치우려 하면서 그것도 아린의 탓이라며 자기합리화를 하려 든다. 그럼에도 가족에게 매여 있던 아린이 결국 끊어야 할 악연을 끊고 가는 모습은 이 이야기에서 가장 감동적이고, 어느정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럼 인간 장아린은 사랑하나요?”

한편으로 이 이야기의 다른 축은 계약연애의 진실성이란 무엇인가, 인데… 사실 수많은 로맨스에서 말하는 진실한 사랑의 결말이 결혼, 즉 계약관계로 마무리된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 이야기는 소위 “선결혼 후연애”물의 매우 현대적인 버전이자, 사랑한다는 이유로 착취를 정당화하는 원가족이나 아린의 옛 남자들의 모습과, 일단 계약으로 연인인 척 하지만 자기가 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또 직장상사과 부하직원이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일 앞에서는 주저하는 유후영의 “나름대로 윤리적인” 모습을 대비하며 로맨스물에서의 “사랑”이나 “결혼”을 “어느정도 쌍방에게 합리적이며 일방에게 폭력을 휘두르거나 착취하지 않는 형태의 계약”으로 대유하는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계약으로서의 결혼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묶여 사랑의 이름으로 착취당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공동체가 되고, 서로에게 공정하게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관계가 되는 것이니까.

후영의 원가족에게서 볼 수 있는 “기울어짐”과 “공정함” 혹은 “불공정함”, 그리고 아린의 원가족에게서 볼 수 있는 아린에 대한 착취 모두 돈의 문제, 즉 자본주의적인 문제가 결합되어 있는데, 그런 점에서 이 이야기는 영화 “기생충”과도 한 카테고리로 묶어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작가님의, 남녀관계에서 애정의 문제와 돈의 문제가 얽혔을 때의 두 사람의 관계의 무게중심에 대한 점은, 저 “추상의 정원”에 이어 계속되는 화두인 것 같고.

그건 그렇고.

전작 “추상의 정원”에서는 자본을 가진 것은 나딘, 그리고 남자로서 나딘이 갖지 못한 법률적 권리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알랭이다. 그러면서도 사업이나 다른 문제를 제하고 둘의 “연애”는 마치 “강압적이고 돈 많은 나쁜 남자”와 “재주 있고 조신하고 그 집에 어떤 이유로 묶여 있는 사연 있는 여자”의, 좀 전형적인 로맨스에서 성별만 바꾼 형태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번에는, 유후영은 “자본을 가진 알랭” 같은 느낌이다. 그는 자본을 갖고 있고, 사연이 있으며, 계약이라는 형태(고용계약 및 계약연애)로 아린을 붙잡을 수 있는 입장이며 마치 알랭처럼 “이래도 되는지”에 대해 계속 고민한다. 물론 잘생기고 몸 좋고 그런 부수적인 면에서도. 말하자면 그가 그녀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제외하면 힘의 격차가 큰 상태인데, 아린은 나딘이 아니지. (오히려 나딘을 연상하게 하는 것은 후영의 형 쪽이라고 생각한다. 정확히는 ‘길을 엇나갔을 어떤 if의 나딘’.) 이 상태에서, 거기다 로맨스라는 형태를 빌어서, 사람의 공정한 관계와 그를 명시하는 계약의 성립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이 작가님은 또 하고 말았다. 물론 애초에 현실적인 부분에서 기울어져 있는 관계이기 때문에, 계약으로 묶인 뒤 두 사람의 미래는 또 사랑과 현실과 가족과 기타등등으로 덮인 새로운 문제들을 발생시키겠지만, 그래도 관계에 대한 어떤 가능성들을 말하고 있다는 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와 별개로 참 이 작가님은 베드신을 잘 쓰신다. 어떻게 이게 되지.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