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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나 페이의 보시팬츠 – 티나 페이, 박가을, 책덕

티나 페이의 보시팬츠
티나 페이의 보시팬츠

티나 페이가 누구인지 이름만 듣고는 몰랐는데, 텀블벅에 이 책이 올라왔을 때 소개를 읽고 흥미가 생겼다. 미국의 배우이자 코미디언, 그리고 작가. (작가!) 1999년, 그러니까 이미 지난 세기말에 SNL 최초의 여성 수석작가가 된 사람이며, “퀸카로 살아남는 법”의 시나리오를 쓰고 직접 출연하고, “30 Rock”을 제작하고 출연했으며, 넷플릭스 드라마들의 제작에 참여하고 자기가 출연도 한 사람. 한마디로 골든 글로브와 에미 상들을 쓸어담았고 마트 트웨인 미국 유머상의 최연소 수상자라든데, 그보다 확실히 기억에 남는 건 그 2008년 비국 대선 때 세라 페일린 패러디한 것. 그 영상은 본 적이 있다. 재미있겠네. 그럼 읽어봐야지.

이 책은 나처럼 티나 페이가 나온 비디오 클립은 본 적이 있어도 그게 그녀인 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뒤쪽에 목록도 달아 놓았다. 나중에 시간이 되면 좀 찾아봐야지.

나는 지난 10년간 사람들의 상사가 되는 게 어떤 의미인지 많이 배웠다. 대부분의 경우, 재능 있는 사람들을 고용한 후 방해하지 않는 것만으로 좋은 상사가 될 수 있다. 사람들의 능률을 높이는 다른 방법은 자신은 상사가 아닌 척하고 다른 사람을 상사처럼 대하게 한 후, 그 사람이 가짜 벽 뒤에서 나에게 은밀하게 정보를 알려 주면 직원에게 전달할 말을 알려 주는 것이다. 어린 시절 생각한 것과는 달리, 상사가 된다고 팔을 흔들며 “나는 보스다! 나는 보스다!”라고 외치고 행진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티나 페이는 “이 책이 정말 재미있어 시누이에게도 사 줄 정도였으면 한다”고 말했는데, 내겐 시누이는 없지만, 이 책의 후반부 쪽은 남의 시누이라고 해도 사주고 싶긴 했다. 전반부, 그러니까 성장기 쪽은 별로 재미있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어린시절 흑역사 농담은 육성으로 들을 때는 재미있을지 모르지만, 그걸 텍스트로 읽는 데는 꽤 노력이 필요하니까. 하지만 몇몇 대목은 역시 눈이 갔다. 이를테면.

대부분의 참여자가 처음으로 여성이 되었다는 걸 깨달은 순간은 어떤 남자가 저질스러운 짓을 했을 때였다. (중략) 다음과 같은 예는 없었다. “토론팀에서의 성공을 축하한다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저녁을 사 주셨을 때 제가 처음으로 여성이 되었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 이런 것. 이런 게 뭔지 알지.

이제 모든 여자는 다음과 같은 요소를 갖추길 요구받는다. ˙백인(코카시아인)의 파란 눈 ˙스페인인의 도톰한 입술 ˙클래식한 작고 둥근 코 ˙털 없는 아시아인 피부에 태닝 ˙자메이카인의 엉덩이 ˙스웨덴인의 긴 다리 ˙작은 일본인 발 ˙레즈비언 체육관 관장의 복근 ˙아홉 살 소년의 골반 ˙미셸 오바마의 팔 ˙그리고 인형 가슴. (중략) 어떻게 이 환경에서 살아남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 딸들과 게이 아들들에게 자신의 모습 그대로도 괜찮다고 가르칠 수 있을까?

또 대구가 맞는 농담을 읽는 것도 무척 즐겁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

우리는 사람들의 체중에 대해서 가타부타하지 말고 내버려 둬야 한다. 잠깐 통통하게 지내는 건 (당뇨병에 걸릴 정도가 아니라면)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 중 하나이고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사춘기나 서서히 공화당원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사람들의 체중에 대해서 가타부타하지 말고 내버려 둬야 한다. 잠깐 마르는 건 (음식을 제대로 먹고, 약을 먹거나 담배를 피워서 살을 뺀 게 아니라면) 괜찮은 취미다. 모두 한 번쯤 시도해 볼 만하다. 엄청 짧게 머리를 자르거나 백인 남자랑 데이트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재미있는 것은 프로듀서가 된 뒤의 이야기들. 이를테면 확실히 이런 이야기는 작가에게도 쓸모가 있는 조언이다. 아, 이 분은 작가이기도 하지만.

프로듀서의 일은 창의성을 북돋는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프로듀서 일의 대부분은 열정을 단속하는 것이다. (중략) “쇼는 준비가 되었기에 시작되는 게 아니다. 11시 30분이기 때문에 시작된다.” 이는 론이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에 대해 자주 하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자신의 글을 너무 애지중지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의 훌륭한 가르침이라 생각한다. 최선의 결과물을 내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 모든 농담을 마지막 최후의 순간까지 발전시켜야 한다. 그러고는 놓아야 한다.

하지만 재미있다고 술술 읽다 보면, 이 방송 업계에서 벌어지는 역겨운 일들에 대해 엿보게 된다. 이를테면 SNL의 원년 멤버인 존 벨루시가 여성 작가를 방해하는 일을 자신의 사명처럼 여겼다거나, 티나 페이가 쇼비즈니스 업계에서 일하기 시작할 무렵 여성 작가는 사무실에 하나씩만 있으면 되는 커피머신처럼 취급받았다거나. 이 업계에 종사하는 여성은 젊어서는 누구와 자거나 시시덕거리는 일조차 없어도 성적대상화가 되고, 마흔이 넘으면 성적 매력이 떨어진 존재가 되어 종종 “미친”것으로 낙인찍히지만, 남자들은 혼자서는 먹지도 씻지도 못하고 심지어 화장실을 코앞에 두고도 귀찮아서 종이컵에 소변을 봐서 사무실에 내버려두는 주제에 여전히 일을 하는 이야기가, 빈정거리는 농담과 함께 이어진다. 그리고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더 많은 여성이 프로듀서가 되어 더 다양한 나이대의 여성을 고용하는 것이라고도. 이건 비단 쇼비즈니스 업계 뿐 아니라, 사실 대부분의 직장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그리고 나는 내 상사들이 그냥 화장실 다녀올 때 손은 씻으시는가 정도만 궁금하게 생각하는 지금이 얼마나 다행인지 문득 생각했다. 사무실에 소변컵이라니.)

그리고 책의 뒤에서 30% 정도는, 정말 눈물 없이는 볼 수 없었다. 아기 기저귀를 갈면서 옆방에서 밤새 작가들과 회의를 하고, 일을 하는 작가로서의 인생. 여기에 모성애를 강조하는 “젖꼭지 나치”들(아, 이거 뭔지 알아. “야심이 가득한 여성들이 사회 활동의 성과에 박탈감을 느낄 때 일어나는 현상”으로 이 책에서는 규정했는데 그건 어느정도 사실이다. 그리고 서양 중산층에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는 게 좀 비극이다.) 그리고 “어떻게 이 모든 일을 다 하세요?”하고 물어보며, 직장 일이나 아이 문제로 뭔가 하나라도 문제가 발생하기를 바라는 눈으로 추궁하듯 바라보는 사람들. 아이를 두고 나와 일을 하면서, 잠시 아이가 그리워서 울다가도 그녀는 생각한다.

이 TV쇼에서 나와 일하는 사람은 거의 200명이다. 많은 이들이 나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아이를 온종일 그리워한다. 나와 같은 시간을 견디며 일한다. 하지만 나와는 달리, 그들은 꿈의 직장에서 일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생계를 위해 이 일을 한다. 만일 내가 나가떨어져 그만두면 그들은 직장을 잃게 된다.

그녀는 둘째를 갖고 싶다는 욕망이 “내가 하기 가장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좇는 것이고, 내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은 걸까?”라고 자문한다. (이 고민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있다. 나는 이 대목에서 조금 울었다.) 그리고 이 책이 나온 뒤 딸을 한 명 더 낳았다고 한다. 여전히 일을 하고 있고. 앞부분에서 티나 페이의 아버지는 남자들이 한수 접는 종류의 존재감이 있는 그런 남자였지만, 딸에게는 애정이 깊었던 것 같다. 사랑받고 있지만 법 위에 있지 않다는(안하무인으로 자라게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안정감을 주는 사람. 그래서인지 저자가 자신의 파란만장한 소녀시절 흑역사들을 농담처럼 떠드는 중에도,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에는 애정이 느껴진다. 아마도 그녀는 역시 그런 부모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누군가 내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할 때마다 이 일을 생각한다. “제리 루이스(Jerry Lewis)가 여자는 안 웃기답니다.”, “크리스토퍼 히친스(Christopher Hitchens)가 여자는 안 웃기대요.”, “릭 펜더먼(Rick Fenderman)이 여자는 안 웃기다는데… 거기에 대해 하실 말씀 있으세요?” 있다. 우리는 너희가 좋아하든 말든 좆도 신경 쓰지 않는다. 물론 소리 내서 말하지 않는다. 제리 루이스는 위대한 자선가고, 히친스는 굉장히 아프고, 세 번째 남자는 내가 만든 가상 인물이니까. (중략) 이 남자들이 내 상사가 아니라면 상관없다. 이들은 내 상사가 아니다. 이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자신이 좋아하지 않으니 훌륭하지 않다고 결론을 내리다니 인상적일 정도로 오만하지 않은가. 나는 중국 음식을 좋아하지 않지만 중국 음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증명하려는 기사를 쓰진 않는데 말이다.

이 책이 나온 뒤로, 합당한 요구를 해도 여자는 단순히 ‘미친’ 사람으로 취급되어 업계에서 사라지는 것을 봤기에 다른 여성에게 기회를 줄 수 있게 업계에 머물겠다는 페이의 글을 보고 감명을 받은 리즈 위더스푼은 직접 제작사를 차리기도 했다는 후일담이 있었다. 좀 더 많은 여성들에게 좀 더 합당한 일을 주는 제작사였기를 기대한다.

그냥 작가, 도 그렇다. 여성 작가가 SF를 쓰면 여자가 쓰는 SF를 누가 읽느냐던(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SF를 많이 읽지도 않는) 사람들이 몇년 전 까지만 해도 흔했다. (지금은 한국 SF 계에 여성작가가 반 이상이라 그런 말이 많이 줄어들었다.) 똑같이 만화나 웹툰을 하는데, 여성 작가에게는 페이를 덜 준다. (잡지만화와 일할 때 공모전/비공모전, 그리고 성별에 따라 첫 원고료가 다른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어떻게든 돈을 덜 주려 하고 어떻게든 깎아내리려 한다. 82년생 김지영이 그렇게 많이 팔리고, 일본에서 김지영 현상이라 할 만큼 붐이 일었는데도 한국 언론들 침묵하는 것 보라지. 남성작가가 비슷한 실적을 냈으면 영웅이 되었을 거다.

하물며 작가이자 보스이며 아이 엄마이기도 한 그녀의 전쟁터는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당신의 에너지는 자신의 일을 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가는 데 쓰여야 한다. 그리고 당신이 책임자가 되면 당신에게 쓰레기같이 군 사람을 고용하지 마라.

아마 그 말 그대로의 인생이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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