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양품은 로프트와 함께, 일본에 가면 꼭 가서 괜히 일없이 놀다 오는 매장이다. 우리 나라에도 들어올 만큼 들어왔지만, 매장에 있으면 무척 편안해진다. 통일되고 단정한 내부, 실용적인 컨셉의 물건들, 그야말로 기본인데, 그 기본이 차별점을 두는 제품들이 꽤 있어서. 문구덕으로 말하자면 화려하지 않고 본질적인데 귀여운 물건들이 꽤 있는 것도 좋다. 무사히 들고 올 자신만 있다면 백지구본을 사오고 싶었는데. 솔직히 무인양품 같은 환경에서 살라고 하면 못 살 것이다. 그래서 무인양품 하우스 모델을 구경하면서도 “이런 펜션이나 호텔이 집 근처에 있다면 가끔 일하기 위해 2박 3일쯤 빌려서 그 안에서 일만 하다 나올 자신은 있는데, 여기서 살고 싶진 않다.”는 농담을 한 적이 있는데, 무인양품에 대한 내 느낌이 대체로 그렇다. 편안히 쉴 수 있고, 집중해서 일할 수 있는 환경. 하지만 내 생활감을 묻히기는 뭔가 좀 애매한, 얼굴 없는 마네킹처럼 범용적인 것들.
어쨌든 그게 무인양품이 싫다는 말과는 또 아주 다른 것이라, 이쪽 제품에 꽤 매력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지. 그래서 그런 컨셉에 대한 아이디어가 있나 하고 책을 읽었는데.
….시간관리법 책입니다. 속지 마세요.
물론 내가, 자기계발서 중에 유일하게 진지하게 읽는 게 이 시간 관리법이나 수첩 쓰기 책이라서 읽은 것 자체에는 후회가 없다. 하지만.
무인양품이란 무엇인가, 를 아는 것과는 좀 거리가 먼 책이다.
오죽하면 이 책에서 제일 마음에 남은 구절이 이거다.
나는 다음 해의 수첩이 발매되는 8월 말이 되면 긴자의 이토야(伊東屋)에 연락하여 곧장 구입한다. 너무 서두르는 것 같지만 이미 이 시기에는 내년의 예정이 이것저것 생기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중략) 내년도 수첩은 보통 가을 무렵에 발매되지만 이토야에서만은 8월 말까지 손에 넣을 수 있다. 내게는 그것도 늦은 축에 속하는 터라 2018년이 되자마자 2019년의 수첩을 발매해 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저도 그래요, 사장님. 아니 실은, 저는 이 수첩과 요 수첩과 저 수첩을 사서 들고가면 셋을 떼어 한 권으로 합체해 주는 서비스가 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제가 사는 수첩값들의 세 배까지는 낼 수 있는데. 그냥 무인양품에서 수첩 조립 서비스 같은 것도 해 주시면 제가 되게 좋아할 것 같은데. 으음.
읽다 보면 혁신적인 지도자가 있고, 또 의욕있는 신입이 있는데 일이 진척되지 않는 현상에 대한 이야기를 후지산에 비유하여 말한다.
후지산을 상상해 보라. 톱(회장)은 정상에 있기에 멀리서 구름이 다가오고 곧 비가 내릴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산기슭에 있는 현장 사원들은 개구리가 울기 시작했기에 비가 올 거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딱 5부 능선 부근에 있는 중간 관리직에게는 그 어떤 정보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 왜일까? 중간층을 사이에 두고 위아래로 안개가 껴 있기 때문이다. (중략) 이 중간층을 어느 회사에서는 ‘점토층’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톱이 아무리 물(방침)을 침투시키려 해도, 부장이나 과장 부근에서 차단되고 만다. 따라서 톱다운이든 바텀업이든 위아래 사이에 확실히 정보를 유통하고 싶으면, 자동으로 소통이 생겨나는 방식을 통해 전달 사항이 제대로 실행(D)되고 있는지, C와 A를 반복해 나가는 방법 외에는 달리 없다.
그래, 어쩌면 그럴지도. (회사 일을 생각하며 웃는 중)
이 책에서 주로 이야기하는 것은 PDCA, 즉 Plan(계획), Do(실행), Check(평가), Action(개선)이며, 수첩을 잘 관리하여 이를 굴러가게 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는 이런 것을 개인적인 일정부터 회사의 시스템 구축까지 다양한 방향으로 적용하고 있었다.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는 분 단위로 쪼개진 일정이 정해져 있기에 계획대로 실행하는 일, 즉 ‘P’, ‘D’에 전념한다. 매일 밤 그날 하루를 되돌아보는 것이 가장 이상적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회식이나 술자리가 많았기에 밤마다 하루를 되돌아보기가 어려웠다.(중략) 그래서 주말에는 일주일을 되돌아보고(C), 다음 한 주를 준비(A)했다. 최대한 서둘러 해치우고 싶었기에 이 일은 주로 토요일에 했다. 이때 확인한 주요 내용은 다음 주 예정된 회의, 손님 방문 및 강연 준비 등이었다.
이와 같이 시간을 만들고, 또 작년이나 재작년의 데이터와 비교하여 계획을 세운다. 저자는 주말에 평가와 개선점을 찾아내고, 또 주간 계획이 아니라 아예 작년, 재작년 수첩을 통해 날씨와 매출, 혹은 신상품 배치의 관계에 아이디어를 얻고 있다. 또한 언제 회의를 하려면 역산으로 언제쯤에는 일정을 수립해야 하는지도 수첩을 통해 계획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저마다 리스크를 안고 일을 해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데드라인(마감)을 정한 후 나머지는 각자 자유롭게 하게 한다. 이것을 위해 만든 시스템이 ‘DINA 시스템’이다. DINA는 ‘Deadline(마감)’, ‘Instruction(지시)’, ‘Notice(연락)’, ‘Agenda(의사록)’의 머리글자이다. 매주 월요일 영업 회의가 끝나면 DINA 시스템을 통해 약 550명의 컴퓨터에 마감, 지시, 연락, 의사록이 표시된다. 부장이 멤버를 모아 영업 회의의 내용을 말할 필요가 없으며, 정보도 누락되지 않는 시스템이다. 그리고 이 화면을 본인이 봤다면 ‘○’가 표시되어 그 사람이 보았다는 사실을 부장이 알 수 있다. ‘×’라면 아직 보지 않았다는 뜻이므로 상대에게 해당 내용을 보도록 지시할 수도 있다.
또한 수첩을 잘 활용하면 시급도는 낮지만 장기적으로 중요도가 높은 일이 밀리는 것을 방지할 수 있는데, 이를테면 기업의 풍토를 만들거나 매뉴얼을 수립하는 등의 일이 그렇다. 저자는 시스템이나 매뉴얼의 구축에 있어서도 무조건 다른 회사의 매뉴얼이나 사례를 따라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만들고, 또 한 번에 제본하는 게 아니라 링파일 식으로 자꾸 내지를 업데이트할 수 있게 매뉴얼을 만들어서(요즘같으면 위키를 쓸 수도 있지 않을까요……) 관리해야 하는 것은, “다른 회사의 매뉴얼을 ‘이식’하여 자기 회사에 맞추어 ‘피가 통하도록’ 만들 수 있는 회사는 백 곳 중 고작 한두 곳이다. 시스템이든 매뉴얼이든 한번 만든다고 해서 영원토록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는, 당연하지만 의외로 관리자들이 그렇게 잘 하지 않는 부분에 대해 여러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당연한 것을 계속하는 것’이 현실에서는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다시 말해 그냥 손을 놓는다면 조직 내에서 자동적으로 PDCA가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무인양품을 기대하지 않고 수첩 관리법을 기대하고 구입했으면 만족할 만한 책이었다.
시간관리에 대한 책을 마지막으로 읽은 게 몇년 전의 일인 것 같다. 하긴, 프랭클린 플래너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후로 한 2005년까지 시간관리나 수첩에 대한 책이 엄청나게 많이 나왔는데, 갈수록 비슷비슷했다. 그래도 좀 쓸모가 있었던 건 “CEO의 다이어리엔 뭔가 비밀이 있다”였고, 실제로 그와 비슷하게 시스템을 구축해서 써 보기도 했다. 물론 프랭클린 플래너도 써 봤고. 한참 이런 책이 안 나왔지, 한동안 자기계발서라고 하면 닥치고 욕하는 책이나 아니면 부둥부둥 힐링하는 책만 잔뜩 있었던 것 같은데. 이런 것도 유행이 도는 걸 보면 재미있기도 하고, 그래서 제목에 수첩 사용법이 아니라 무인양품을 붙여서 내보냈나 싶어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