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 RG VEDA – CLAMP, 서현아 역, 학산문화사

성전 RG VEDA
성전 RG VEDA
성전 RG VEDA

때는 1990년대. 세기말.

이 시기에 청소년기를 보낸 어린 여성 오덕들이 거의 필수적으로 읽던 세기말 만화들이 있었다. 절애라든가, 천사금렵구라든가, 성전과 동경바빌론이라든가 뭐 그런 것들. 여기에 전에 말한 은하영웅전설 같은 것도 있지만, 이건 세기말 감성과는 좀 다른 것이고. 이것저것. 탐미적이고, 우리에게 내일은 없을 것 같고, 뭐 그런 것들 말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처음에 해적판으로 봤다가 서울문화사 정발판으로 봤던 이 “성전”은, 학산에서 다섯 권짜리 애장판으로 나오기에 이른다. 그리고 몇년 더 지나, 리디북스에서 전자책으로 볼 수 있게 되었고. 그야말로 성전을 어떤 책으로 보았느냐, 를 두고 역사를 쓸 수도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어쨌든 오늘 아침에 결제를 해서 십수년, 아니, 대충 20년만에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은하영웅전설을, 오랜 휴덕기를 지나 다시 재입덕하면서 느낀 것은 정말 원작이 다 떠먹여주는 “사랑에 미친 새끼”, 소위 사미새들에다, 동인들이 관계성을 추가한 2차창작에서의 사미새들까지 드글드글해서 그야말로 “러브스토리 인 이제르론”을 찍고 있었다는 건데, 성전은 2차까지 갈 것도 없다. 공식이 다 해 먹는다.

페이지를 넘기면서 새로운 등장인물이 나올 때 마다 20년 전 기억이 떠오르면서 “아, 얘도 사랑에 죽은 놈이지….. 그라고 얘도…..”하고 입가를 부들거리게 된다. 놀라울 것도 없다. CLAMP 만화에 나오는 주요 인물 치고 사미새 아닌 인간이 거의 없었잖아. 세이스바(동경 바빌론에 나오는 세이시로X스바루. 이들의 사랑의 행방은 X에서 다시 나온다.)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사미새의 전설을 쓴 작가집단이라고.

부제가 리그 베다지만 인물들 이름만 따온 정도인 이 만화는, 천제를 죽이고 투신 아수라왕을 살해한 뒤 천제의 자리에 올라 아수라왕의 왕비를 황비 자리에 앉힌 패도의 황제 제석천이, 야차왕을 불러 도망친 성견 구요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며 시작된다. 구요의 오랜 친구인 야차왕은 신탁을 듣고 봉인된 아수라왕의 후계자와 만나지만, 그 대가로 구요는 물론 야차족 모두가 살해당한다. 이후 야차왕은 꼬마 아수라와 함께 “육성”을 모아 봉인을 풀고 제석천에게 복수하기 위한 여정을 걷는다…. 라고 이야기한다면 그야말로 온라인 서점 MD같은 요약이 될 수 밖에 없다. 이 이야기의 가장 큰 악역이자 흑막처럼 나오던 제석천은 선대 아수라왕에 대한 사랑으로 (한 번 같이 자 준 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 아들이 세계를 멸망시키지 않도록 이 모든 악행을 저지르다 못해 세계관 파멸의 직전까지 간다. 그러니 예전에는 사랑 때문에 싸우고 죽어간 전사들 사이에서 끝까지 아수라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고 기다리는 야차를 보면서 이야 트루럽…. 하면서 보기도 하고, 제석천 저거 아무리 사랑에 맛이 간 순정남이라도 저러는 거 아니지, 하고 생각했는데…..

지금 다시 보고 있으면 선대 아수라왕이 저 딱한, 힘세고 강하며 지고지순한 사미새를 고작 딱 한 번 자 준 뒤 죽은 뒤에도 아주 고혈까지 쪽쪽 빨았구나 싶은 것이다. 그러기 위해 그 몸의 피 한 방울 뼈 한 조각까지 모두 제석천에게 주기도 했고(……) 실제로 아수라왕이 죽은 이후로 그만의 인생이라는 것은 없었으니. (사지를 황비로 맞아들인 것도 꼬마 아수라를 막기 위해서였고, 그간 저지른 악행도 대부분 아수라를 막고 육성을 한데 모이지 않게 하려던 것이었으니.)

근데 아수라왕이 세계가 멸망하더라도 내 자식을 낳고 싶었다, 라고 말하는 게 과연 트루일까, 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되는데. 어차피 제석은 반역을 저지를 거고 어차피 자신은 그에 맞서야 하는 운명이니, 그럴 거라면 자신을 사랑해서 미칠 저 남자가 건달파왕처럼 되지 않도록 “살아서 뭔가 할 일”을 만들어 주기 위해 굳이 세계를 멸망시킬 후사를 만들어 놓은 건 아니었을까. 이건 어쩌면 장렬한 쌍방짝사랑의 이야기인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생각해 보면 소년이었던 야차왕에게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강해지라고 말했던 것도 저 아수라왕이니, 아수라왕은 몇 명의 인생을 망친 거야, 대체.

어쨌든 공작 캐릭터가 나올 때 마다, 아, 요즘은 저런 제로스 눈으로 웃는 흑막캐가 확실히 많이 사라졌지 하는 생각도 하고, 연출은 시대가 흘러 달라졌음에도 클램프의 그림은 여전히 이만큼 시간이 흐른 뒤애 다시 보아도 여전히 세련되고 화려한 것에 다시 놀라게 된다.

PS) 그건 그렇고 마족들이라든가, 아수라의 봉인 같은 여러 디테일한 부분들, 90년대에 볼 때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확실히 기거의 영향을 많이 받은 느낌도 들고. 몇몇 부분은 확실히 기거 놓고 그렸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음. 어릴때는 몰랐네.

PS2) 클램프 하면 사실 제일 치명적인 커플이 동경바빌론의 세이스바(세이시로X스바루)다. 그런데 이 관계는 아수라와 제석천 관계랑 딱 맞는게…… 쌍방짝사랑 – 싸움 – 죽은 뒤 육체의 일부를 전해주어 그것이 남겨진 사람의 신체 일부가 됨 – 남겨진 자는 사미새가 됨, 의 구도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뒤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어요, 와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살기를 원하니 내가 어떻게 죽을 수 있겠어요. 이것이 정말 클램프 만화의 엑기스.

PS3) 어느 분이 육성 중 한 명인 소년왕 용왕을 두고 성전의 양심이라고(다른 놈들 다 남녀 할 것 없이 사랑에 미친 놈들이었다고) 하시는데, 내 눈에는 성전의 “양심”을 담당하는 게 아니라 “동정남”을 담당한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 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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