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 대하여 – 김혜진, 민음사

딸에 대하여

딸에 대하여

아침에 아기에게 분유를 먹이면서 읽기 시작했다. 무척 좋은 이야기이고 이 시기에 꼭 필요한 소설이지만 수유하면서 읽기에는 무척 부적절하다는 생각은 초반에 들었다. 그렇다고 읽기를 중단하진 않았다.

10년 뒤에는 낡은 감상이 되어야 하겠지만, 지금은 좀 더 여성 작가의 서사가, 여성이 주인공인 서사가, 성소수자의 서사가 필요하고, 이 소설은 그 셋에 다 해당한다.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소설. 민음사의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가 무척 신경을 쓰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전직 초등교사로, 딸을 키우기 위해 일을 그만두었다가 저임금 육체노동을 이어가며 현재 요양병원에서 돌봄노동을 하고 있는 “나”는, 경제적인 이유로 멀쩡히 지어준 이름을 두고 “그린”이라 불리는 딸과, 그 아이의 애인인 “레인”과 한 집에 살게 된다. 딸은 시간강사고, 레인은 요리사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여성 인물들은 모두, 일을 하지만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다. 요양원에서 같이 일하고 있는 새댁이나 교수 부인이라 불리는 여자도, “나”가 돌보고 있는 젠, 원래는 이제희라는 이름의, 청춘과 귀중한 돈을 다른 사람들을 돕는 데 다 써버리고 존경받을 만한 인생을 살았지만 지금은 치매에 걸려,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한 채 욕창에 시달리는 할머니도.

끝이 없는 노동. 아무도 날 이런 고된 노동에서 구해 줄 수 없구나 하는 깨달음. 일을 하지 못하게 되는 순간이 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 그러니까 내가 염려하는 건 언제나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어떤 식으로든 살아 있는 동안엔 끝나지 않는 이런 막막함을 견뎌 내야 한다.

2017년 기준으로 여성의 임금은 남성의 약 66%. 2/3밖에 되지 않는다. 전에 누가 그런 말을 했다. 그래서 게이 커플이 레즈비언 커플보다 덜 가난하다고. 그린과 레인은 가진 돈을 합쳐서 살 집을 얻었다. 그린은 동료 강사가 부당 해고를 당한 것에, 남들 눈에는 떼 쓰고 억지 부리며 아까운 시간을 길에 다 내버리는 짓, 연대와 투쟁을 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고, 그 과정에서 집 보증금을 빼서 썼기에, 딸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머니와 불편한 동거를 하게 된다.

이봐요. 내 딸은 그런 애가 아니에요. 내가 알아요. 우리 딸은 내가 잘 알아요.

“나”는, 그러니까 그린의 어머니는 “힘들게 사는 자식이 평범하고 수수하게 사는 걸 볼 권리가 있다”면서, 그야말로 평범하고 수수하게 폭력을 휘둘러 댄다. 그녀는 딸이 “세계를 거부하는 법. 세계와 불화하는 법.”을 알 만큼 불필요하게 공부를 많이 했다고 생각한다.

삶이 어디 자기 한 사람 것인 줄 아니? 그런 삶은 없어.

읽는 내내 숨이 막혔다. 저런 말은, 삶이 어디 자기 한 사람 것이냐는 말은, 세상 누가 저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사느냐는 말은, 어디서 가르쳐서 내보내기라도 하는 걸까. 이 소설의 화자는, 어머니는, 정말 현실적인 인물이라서 그 행동 하나하나에 배인 혐오까지도 납득이 가는 한편, 불쾌한 골짜기를 건드릴 정도다. 그런 사람이 스스로에 대해 하는 생각에,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 했다.

나는 좋은 사람이다. 평생을 그렇게 하려고 애써왔다. 좋은 자식. 좋은 형제. 좋은 아내. 좋은 부모. 좋은 이웃. 그리고 오래전엔 좋은 선생님.

사실은 그렇게 믿고 싶은 것 뿐이겠지만. 그 믿음으로 어떤 식으로든 자식을 휘두르고 겁박하려는 꼴들을 현실에서 봤어서, 겪어 봤어서, 내 주변 사람들도 겪어 왔어서. 읽는 내내 고통스러웠다. 자식의 행복이 아니라 주변의 시선을 더 생각하고, 그저 평범하라고 강요하고,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묶어버리듯이 세상의 틀에 딱 맞게, 모나지도 잘나지도 못하지도 않게 살라고 계속해서 인생을 건드리다가 결국에는 망쳐버리기 직전까지 가는 경우들 말이다.

다행히도 “나”는, 딸이 연대하는 대상과 딸의 입장이 마찬가지라는 것을 이해한다.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사람이 딸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는 자신을 부끄러워 하기도 한다. 자신의 소중한 인생을 남을 위해 낭비한 젠, 다른 사람들과 연대하다가 다치고 싸우는 그린, 그리고 자신을 싫어하는 줄 알면서도 “나”를 위해 음식을 만드는 레인에게 받은 자극이 쌓이고, 마침내 부끄러움을 자각한 캐릭터는, 그동안 살아온 관성에서 벗어나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녀는 존경받을 만한 삶을 살았지만 욕창을 악화시키지 않을 만큼 충분한 기저귀조차 주어지지 않은 채 요양원으로 실려가는 젠의 처우에 항의하다 일자리를 잃고, 젠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다. 연민이자 인정이고 연대다. 젠의 마지막을 지켜보고, 장례를 치르며, 그녀는 그린과 레인을, 그들과 함께 하는 일상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는 못해도 “끊임없이 싸우고 견뎌야 하는 일상”으로서 살아가게 된다. 당연하지만 극적인 반전이 곁들여진 사이다 서사와는 거리가 멀다. 동성애자인 딸을 이해하고 끌어안는 계몽적인 이야기와도 거리가 멀다. 하지만 이 답답한 “나”는, 현실의 부모보다는 한 걸음, 힘들게 앞으로 나갔다. 현실에서는 젠을 집으로 데려오거나, 그녀를 위해 요양병원에 항의하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딸과 화해하지 못하고, 그 연인을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못해도, 다만 느슨한 연대라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다행이구나 생각하게 된다.

비정규직이고, 동료를 위해 투쟁하다가 살던 집 보증금을 빼먹고, 성소수자인 것이 아니라 해도, 수많은 자식들이, 특히 장녀거나 어떤 식으로든 어머니의 기대를 받은 딸이 어머니의 기대를 배신하며 살아가는 과정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있다. 나와 내 부모의 관계, 나와 내 아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부당했던 기대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품었던 희망에 대해서도. 부모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있다. 그걸 놓지 않아야, 이걸 반복하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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