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읽기-093] 제49호 품목의 경매 (토머스 핀천) 민음사 세계문학 147

제 49호 품목의 경매

자신의 삶에 대해 답답함을 느끼는 평범한 주부 에디파는 타파웨어 파티에 다녀온 날 옛 애인 피어스의 변호사 메츠거로부터 피어스의 공동 유산관리인으로 지정되었다는 편지를 받는다. 에디파는 피어스가 살았던 샌나르시소로 떠나고, 변호사 메츠거와 모텔 관리인 마일스, 록그룹 파라노이스를 만난다. 때맞추어 모텔의 TV에서는 메츠거가 예전에 베이비 이고르라는 이름의 아역배우로 출연했던 영화가 나온다. 마치 누군가가 이 상황을 통제하는 것 처럼.

매트릭스? 사이버 세계? 가상현실? 그보다 먼저 떠오른 것은 트루먼 쇼다. 우리가 알고 있던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이면의 역사가 존재하고, 절대적인 가치를 갖고 있던, 평범하고 안정적인 삶의 뒷면에서 진실들이 비죽비죽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피어스는 샌나르시소라는 한 도시를 만들어내다시피 한 인물이자, 요요다인 항공우주회사와 필터공장 등의 주식 지분을 갖고 있다. 에디파는 피어스의 유산을 추적하던 중, 요요다인의 직원들이 W.A.S.T.E.라는 약자와 약음기가 달린 나팔 마크로 상징되는 사설 우편제도로 편지를 주고받는 것을 목격하고, 팬고소 호수에서 사람들의 뼈를 건져낸 것을 본다. 에디파와 메츠거는 연극을 보러갔다가 경비병들이 살해되어 호수에 던져지는 장면을 본다. 이때 “트리스테로와 밀약을 맺은 사람”이라는 대사가 나온다. 하지만 연극의 대본에는 트리스테로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에디파는 다시 팬고소 호수로 찾아가고, 안내판에서 우편회사 직원 열두 명이 검은 제복의 약탈자 무리와 싸웠다는 설명을 읽는다. 에디파는 젱키스 코헨을 만나 W.A.S.T.E.라는 글자가 들어간 우표와, 훗날 비스마르크 정부로 흡수된 유럽의 민간 우편조직 이야기를 듣고, 유럽에서 이렇게 정부로 흡수된 우편제도와 대립했으며 미국에도 등장하여 공식 우편제도와 대립하고, 성적소수자와 비주류적 인물들의 정보 소통의 통로가 되어 있는 트리스테로 – 상징은 약음기가 달린 나팔 – 의 존재를 알게 된다.

처음에 에디파가 탑 밖으로 머리카락을 내밀고 있던 라푼첼의 이야기를 언급하는데, 그녀는 구원을 청하는 수동적인 라푼첼이 아니라 오히려, 탑 밖으로 스스로 손을 내미는 라푼첼로 보인다. 그녀는 안정된 인생 = 탑에서 벗어나 샌나르시소 = 진실을 내포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 스스로 인생의 주체가 되어, 자신에게 다가오는 진실들을 받아들인다. 에디파가 트리스테로의 비밀을 찾는 동안, 그녀의 남편은 마약에 중독되고 변호사 메츠거는 여자와 눈이 맞아 도망치는 등 불운이 끊이지 않지만, 에디파는 W.A.S.T.E.의 의미 – 우리는 고요한 트리스테로 제국을 기다린다’(We Await Silent Tristero’s Empire)-를 알게 된다. 그리고 이 트리스테로의 존재를 확인할 유일한 증거인, 피어스의 유산, 제 49호 경매 품목인 위조우표를 구입할 누군가를 기다리며 작품은 끝난다. 그리고 유산을 처리하기 위해 피어스의 수집 우표를 경매에 부치기로 한 날, 제49호 품목으로 지정된 위조우표를 구입할 누군가를 기다리며 작품은 끝난다.

중간중간, 맥스웰의 수호정령(열역학 제2법칙-엔트로피 이론-에 예외를 제공)과 같은 물리학적 요소들이 튀어나온다. 엔트로피는 사용 불가능한 에너지의 양으로, 닫혀 있는 세계에서 엔트로피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면 필연적으로 파멸이 일어난다. 에디파가 원래 살고 있던 세계가 바로 그러하다. 하지만, 열린 세계는 살아남을 수 있다. 이 열린 세계로의 단초가 바로 트리스테로. 사설 우편 조직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싶지만, 이것은 곧 정부 주도의 우편조직이라는 것 자체가 정보의 통제를 의미한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트리스테로는 이를 억제하기 위한 새로운 대안이다. 그 역시 한계가 있겠지만, 적어도 닫힌 세계를 뚫어주는 하나의 소통방식은 될 수 있다. 그 트리스테로를 이용하는 사람들, 비주류적 인물들 또한 그러하다. 이들은 평범한 세계에서는 비주류, 패배자, 루저일지 모르지만, 동시에 경직된 사회에 활력을 만들어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 유연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소설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답게 다소 난해한 면이 있는데다 번역 또한 그렇게 훌륭하다고만은 할 수 없어서 읽을때 약간 고생하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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