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읽기-069] 야성의 부름 (잭 런던) 민음사 세계문학 30

야성의 부름
야성의 부름
야성의 부름

학교다닐 때 “야성의 절규” 라는 제목으로 읽었던 소설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중산층 가정에서 사랑받는 애완견으로 살아가던 버크가, 어느날 정원사의 손에 끌려나와 유콘으로, 그것도 썰매개로 팔려나간다. 그야말로 멀쩡히 살던 도련님이 갑자기 납치되어 새우잡이배에 끌려간 것 같은 상황이다. 새 주인은 그나마 개를 아끼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버크는 이곳에서 많은 경쟁상대와 추위와 굶주림과 같은, 이전에는 겪어보지 못한 고난을 겪게 된다. 그야말로 사랑받고 자란 가엾은 개 갑자기 냉정하고 매몰찬 생존의 전장으로 끌려나가, 한 발 재겨 딛기라도 하면 그대로 죽임을 당할 듯한 환경에 처하게 된 것. 그러나 버크는, 이 극단적인 상황에서 자신의 원시적인 본성, 늑대로서의 본성에 눈을 뜬다. 마치,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딛을 데도 없다” 하던 이육사 시인이 초극의 의지에 눈을 뜨는 것 처럼.

그렇게, 자연으로 돌아간 버크는 꿈 속에서 종종, 자신을 돌봐주었던, 혹은 지금 함께 달리는 문명화된 인간이 아닌, 혈거인들의 모습을 본다. 거부할 수 없는 외침, 그것이야말로 그를 부르는 야성의 외침이자 절규. 그것은 안락한 문명 속에서 살아가던 한 개가, 자신의 본성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숙명 그 자체다. 버크는 결국 자신의 새 주인마저 죽은 뒤, 인간은 물론, 문명과 야성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는, 즉 거친 환경에 놓여 있으나 인간의 지배와 보호를 받고 있는 썰매개로서의 생활에서도 벗어나, 늑대 떼에게 달려간다.

로빈슨 크루소…… 는 문명인이 혼자 무인도에 버려졌음에도 나름대로의 문명을 건설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다.

타잔은 더 심하다. 영국 귀족의 아들인 어린 아기가 유인원 무리에서 키워졌으면서도 부모가 남긴 책을 보고 스스로 읽고 쓸 줄 알게 되며 문명인들과 대화하고 그들을 구해낸다. 어릴 때는 읽고 오오, 하고 감탄하면서도, 어른이 되어서 보면 어쩐지 이게 말이 되나 싶어진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한 달만 속세와 인연 끊고 자취방에 콕 처박혀 살아봐라. 집안 꼴이 어떻게 되나. (진지) 웬만한 사람 아니면, 집안의 질서라는 것은 안드로메다로 날아간지 오래일 걸. 그런 것을 보면, 신독이라는 말은 어디 갔나 싶기도 하고, 문명인이 정말로 무인도나 정글에서 문명인으로서의 자존심과 삶을 유지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그런 점에서 로빈슨 크루소보다, 프라이데이 아닌 방드르디를 만나 좀 더 자연에 가까워진 모습으로 변모하는 로빈슨의 모습이 납득이 갔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참조)

그런 점에서, 인간에게 사랑받던 애완견(이 어감도 엄청나게 미묘하지 않은가)에서 자아를 갖고 야성으로 돌아가 무리를 이끄는 대장이 된 버크의 행보는, 문명에 찌들어 오히려 문명의 노예가 되어가는 인간에게 자극이 되지 않는가. 라는 평범한 감상으로 끝을 맺기 전에.

민음사 세계문학 30번은 분명 롤리타였는데? 왜 야성의 부름이 30번인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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