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읽기-054] 황제를 위하여 1, 2(이문열) 민음사 세계문학 51, 52

황제를 위하여
황제를 위하여
황제를 위하여

예전에 고려원 판으로 읽었던 것을 이렇게 다시 읽게 될 줄은 몰랐다.

이문열, 그의 정치적 발언과 행보에 대해 불만을 품고 책을 헌책방에 팔아치우거나 불을 지르거나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리고 나는 이문열이 정치적 발언으로 삽질을 하자마자 헌책방에 달려가 그의 책 중 예전 것들로 손때도 거의 안 탄 새것들을 골라서 싸게 사들고 왔다. 이것이 기회주의자 책덕후의 행보.) 황제를 위하여 고려원 판, 도 그렇게 구입한 책이었다. 그런 사건이 있지 않고서야 내가 대학생이 되기 한참 전에 망해버린 고려원의 책을 어디 가서 그렇게 새삥한 물건으로 구해올 수 있었으랴.

르포 기자인 화자는 부장이 내민 “신역 정감록”이라는 책을 들고 계룡산으로 취재를 간다. 그곳에서 그는 그곳의 산골마을 흰돌머리에서 황제로 태어나 황제로 길러졌던 노인을 만나고 백제실록이라는 책을 보게 된다. 그리고 노인이 죽었다는 말을 들은 화자는 백제실록을 토대로 황제의 일생을 적기 시작한다.

정감록의 예언대로 이 세상에 온, 계시와도 같은 잉태의 예언과 범상치 않은 탄생, 그리고 신동이라 불릴 만한 빠른 이해력과 학습력(아마도 이 산골이 아니었으면 총기가 있는 편이라는 말을 들었을 정도가 아닐까)으로 이곳 사람들에게 당연히 예언의 황제로 받아들여진 소년, 그리고 그를 당연히 황제라고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마을 사람들.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세뇌하고, 작은 행동이나 판단조차 신격화하며 다시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는 전설을 만들어 가며 충성을 공고히 했다. 조선은 망한다. 이씨들의 조선은 망하고 정씨의 세상이 온다. 정감록이 말하던 그 때가 눈앞에 온 듯 하나, 사실 그들은 이 산골 마을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고 황제 역시 그러하였다. 그들은 이, 제한된 공간 안에서 격변하는 시대와 철저히 유리된 채 살아간다.

이 거짓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황제의 아버지인 정 처사? 막막한 조선 말기의 시대 상황에서 그는 자신의 아들에게 희망을 걸었을 수도, 혹은 그렇게 너는 황제가 될 인물이라고 가르치고 말하는 것으로 인하여 아들이 그런 큰 인물이 되리라는 꿈을 꾸었을 수도, 그도 아니면 망상에 사로잡힌 인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윤색해낸 신화는 조잡하여, 조금만 눈여겨 볼 수 있는 이라면 그 실체를 그대로 들여다볼 수 있을 만큼 허약하다. 황제가 일본을 상대로 호통을 쳤다 한들, 그저 산골에서 일어난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이 나라 역사에 한 톨도 영향을 끼치지 못했을 일에 불과하다. 하지만 소위 “촌무지렁이”들이고, 산골에 처박혀 살며 “정보가 제한된”이들은 이것을 신화로 여기며 충성을 바치고, 다음 세대들에게도 황제에 대한 충성을 가르친다.

유교적인 바탕에 도교적이고 미신적인 요소가 놀랍게 결합되어, 다시 한 나라의 역사를, 한 인물의 일생을 그려내는 이 소설은 그래서 씁쓸하다. 황제가 집을 비운 사이 황제의 아내가 아이를 가졌음에도, 황제는 자신이 밤새 다녀갔다고 거짓으로 대답한다. 그 말을 믿는 마을 사람들을 보는 황제의 비애란 어떤 것일까. 또, 반역자를 따라 마을을 떠나버린 태자, 융을 보는 마음은.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역사속에 기록되지 않을 그런 황제로 살아가는 것이 결코 행복한 일이 아닐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광대와도 같은 인생 속에서 행복을 찾았다면 그것은 황제가 결국 자기 자신마저 온전히 속였다는 뜻일거다. 바라보는 우리들이 보기에 그렇게 우스꽝스러운 그 모든 일들에도 의미를 붙이면서. 그런 삶에는 대체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것일까. 온 세상이 한 사람을 속인 트루먼 쇼와 달리, 황제는 결국 자기 자신을, 그리고 주변을 속이며 격변기를 살아간다. 무모하고 고지식하고 우스꽝스러운, 그러나 고결함만은 남아있는 그 모습은 근대사를 살아가는 돈키호테와 다를 바가 없다. 격변기의 역사를 살아가는 것이 아닌, 꿈 속을 살아가는 돈키호테.

제법 책 속의 황제들, 요나 순과 같은 유교의 이상적인 황제들의 삶과 엇비슷해 보이지만 짝퉁에 불과한 백제실록 속의 황제의 모습과, 자기 자신을 찾지 못한 채 그저 미치광이 황제로서, 사실 바깥 세상에서는 사람 대우도 받지 못할 범죄자나 사기꾼, 알콜 중독자 등의 ‘미친 놈’들을 자신의 충실한 가신으로 삼으면서, 황제는 변화하는 시대를 살아간다. 마침내 일본이 물러나고 새 세상이 오지만, 황제는 자신이 이씨를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리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제헌의원에 출마해 보라는 사람들을 꾸짖기까지 한다. 그러나 새로운 세상에서, 대통령이 된 이는 조선과 마찬가지로 이씨 성을 한 사람이었다. 황제는 실의에 빠진다. 전주 이씨. 그가 되어야 했던 “남조선국”의 황제 자리는 그가 아니라는 것을, 그는 깨달았을까. 혹은 세상에 바뀌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따르는 신민들을 위해 함께 바보가 되어야 했을까.

무엇이 되었건 황제는 숨을 거둔다. 그때 갑자기 하늘이 칠흙 같이 어두워지고 광풍에 고목이 뿌리 채 뽑혀 날아 감직도 하지만, 그런 일은 있었던 성싶지 않다. 라는 대목은 화자의 첨언이되 그의 인생이, 그의 신화와 같던 삶이 사실은 거짓이었음을, 한 판 놀이에 불과했음을 자르듯 보여준다.

그런데 우리가 그, 황제의 어리석은 신민들보다 나을 것은 또 무언가.

우리가 그들보다 나은 것은, 우리가 조금 더 넓은 우물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 밖에는 없다. 그 와중에도, 인터넷이라는 광활한 정보의 바닥에서 막대한 정보를 누리고 살아가면서도, 제한된 정보만 받아들이는 것은 마찬가지다. 고정된 프레임, 전쟁을 겪은 세대는 여전히 반공이라는 프레임, 국가라는 프레임에 모든 것을 맞추고 있고, 노조는 나쁘다고 생각하거나 특정 정당이라면 생각하지 않고 찍거나 하는 등. 정보가 많아지고, 모든 정보를 다 접할 수는 없는 세상이 되며 오히려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정보만을 접하게 되어버렸다. 이 과정에서, 프레임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은 더욱 편협해지고, 우리의 인식은 그 프레임을 벗어나기 쉽지 않아졌다. 옛 시대와 다른 것이 있다면, 스스로의 각성을 통해 그 프레임을 벗어나거나, 혹은 시각의 저변을 넓힐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시대가 변했는데도 그 산골에서 황제놀이를 계속한 황제와 그의 신민들 역시, 스스로 바깥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음에도 바깥의 모든 것을 부정하며 살아가는 것은 마찬가지다.

누가 더 어리석은가. 우리는 그들을 어리석다고 비웃지만, 실제로 스케일의 차이가 있을 뿐, 프레임 안으로만 세상을 보는것은 마찬가지다. 이것은 좀 더 극단적이고 풍자화된, 희화화된 예일 뿐이다. 채만식의 소설 속 세상과 같이. 하지만 (수능이나 교과서에 나온다는 이유로) 태평천하를 보며 윤두꺼비의 행태에 배를 잡고 웃던 중고등학생들도 자라서 하는 짓들이, 윤두꺼비와 그렇게 다르지 않은 것이 사실. 벗어나고자 한다면 더 큰 어떤 각성이 필요하다.

그 각성이 없다면 황제의 신민들이나 우리들이나 사실은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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