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읽기-034] 삶의 한가운데 (루이제 린저) 민음사 세계문학 28

삶의 한가운데

불꽃같은 생명력을 지닌 니나 부슈만, 그리고 처음 만났을 때 아직 소녀였던 그녀보다 스무 살 가까이 나이가 많은 의사였고, 18년동안 그녀만을 사랑해 온 의사선생, 슈타인. 슈타인의 사랑이,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에서 볼 수 있는 억압적이고 절제된 사랑, 그러나 좁은 문의 제롬처럼 끈질기게 계속되고 갈망하는 사랑이라면, 니나는 스스로의 삶을 고통과 격정 속으로 내던지기를 주저하지 않는 여성. 자유를 갈망하고, 죽음을 갈망하며, 자신에게 던져진 고단한 운명에 헌신하듯 스스로를 던지는 생명력의 소유자다.

그 두 사람의 사랑, 혹은 니나 부슈만의 인생은 두 시각으로 그려진다. 하나는 냉철하고 이성적으로 모든 것을 기록해 나간 슈타인의 일기와 편지, 또 하나는 결혼하고 평범하고 따뜻한 가정의 행복 속에 몸을 맡긴 채 투쟁없이 살아온 그녀의 언니의 시선.

자정이다. 부드럽고 커다란 피곤감이 엄습하는 것을 느낀다. 여태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긴장에서 풀리는 데서 오는 것이었다. 사지가 달콤하게 이완되고, 감각도 따라서 이완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인간이 행복하다는 것은 가능하다는말인가? 내가 바로 그렇다. 니나와 나는 항생 행복할 것이다.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라는 말을 나는 더 이상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니나로부터 생명을 얻었다.

금욕적이고 염세적인 슈타인에게 있어 니나의 존재는, 그 존재 자체가 삶이었다. 나는 니나로부터 생명을 얻었다, 는 슈타인의 말에 밑줄을 그으며, 그렇게 타인으로 인하여 얻은 생명은 결국, 그 타인에게 끌려다닐 뿐이라는 생각에 안타까웠다. 스스로의 자유, 니나는 붙잡을 수 있는 그 자유가 슈타인에게는 번뇌가 된다는 것도.

 인간은 왜 고통을 통해서만 지혜에 도달할 수 있는 거야? 니나는 나지막이 말을 계속했다. 소리는 작았지만 완강한 어투였다. 그리고 전혀 원하지 않는데도 왜 현명해져야 하는 거야?

자신의 생명력으로 인해, 그리고 살며 겪었던 그 많은 고통과 상처로 인해 성장하고 작가가 되었지만, 니나는 자문한다. 아마도 그녀는 진심으로, 그런 것을 온전히 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가, 상처받는 것을 원할까. 누가 고통과 싸우고 폭풍같은 운명과 맞서기를 원할까. 그녀는 행복과 평화로운 가정을 손에 넣지는 못했다. 그러나 고통과 격정에 온 몸을 맡긴 그 청춘이 있었기에, 니나는 자유를 가질 수 있었다. 안온한 인생을 살아온 그녀의 언니와 달리, 혜안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지금 니나는 다시 자고 있다. 울음 끝에 그녀는 쉽게 잠이 들었다. 나는 오늘 밤도 어젯밤처럼 여기 있는 소파에서 보낼 것이다. 나는 그녀의 숨소리를 들을 것이며 그녀가 깨면 우유를 가져다 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마음의 평정을 찾으려고 애쓸 것이다. 마음의 평정을. 얼마나 멋진 표현인가. 이 마음의 평정이라는 말은. 아니다, 나는 결코 마음의 평정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니나는 해낼 것이다. 니나, 너는 인생을 신뢰한다. 비록 네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해도, 또 네가 그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해도. 너에게는 생을 끊으려는 이 시도도 삶의 일부인 것이다. 이것은 너의 정신과 생명력이 너에게 부여한 새로운 뉘앙스이며, 하나의 충격이며, 깊고도 흥미로운 경험이며 일종의 실험인 것이다.

어려서 결혼하여 나오며 여동생과 헤어진 언니는, 그 동생에 대해 알지 못했다. 들은 이야기들이, 그녀가 동생에 대해 아는 전부였다. 하지만 그녀는 어린 시절, 한밤중에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여동생의 모습을, 고통을 참아내는 결연한 의지를 기억하고 있다.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인생을 격정적으로 살아가는 여성을 통해, 삶을, 그리고 그녀가 한때 꿈꾸었던 죽음을 본다. 죽음 역시도 삶의 일부이며, 혼신을 다하여 살아내는 이에게만 그 마지막 헌신과도 같은 죽음이 찾아들리라. 책 뒤에 나와 있는 루이제 린저의 말을 다시 본다.

사람들은 나이 삼십에 늙기를 시작해야 한다. 그것은 멋진 일이다. 사람들은 실제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것인가를 알게 된다. 지성과 철학적 혜안을 통해 큰 자유에 도달한다. 삼십 이전에는 고통과 격정에 완전히 자신을 맡겨야 한다. 모험을 감행해야 한다. 그렇다! 털 뽑힌 호랑이가 되어야 한다. 안 그럴 경우 맥없는 고양이일 뿐이다. 고통과 격정에 헌신하지 못하는 사람은 죽을 수도 없다. 죽는다는 것은 마지막 헌신이기 때문이다.

루이제 린저의 그 말, 그것이야말로, 길 위에서 살아가고 사랑하며 인생을 보내고 숨을 거두는 골드문트의 마지막과 다를 것이 없다. 시대가 다르고, 그들이 살아간 길이 다르다 해도, 결국 그 본질은 같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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