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읽기-024] 인간의 굴레에서(서머싯 몸) 민음사 세계문학 11, 12

인간의 굴레에서
인간의 굴레에서
인간의 굴레에서

 

의사인 아버지와 감수성이 풍부한 어머니 사이에서 절름발이로 태어난 필립 케어리는,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도 병으로 잃고 블랙스터블 교무구의 관할사제인 백부 케어리 씨 슬하에서 자라게 된다. 이 소년은 목사가 될 것이라는 백부와 교장의 기대를 받으며 신학교에 다니지만, 졸업을 한 학기 남기고 신학교를 그만둔다.

필립 케어리는 비범한 사람도 아니고, 한 분야를 들이 파는 노력가도 아니며 천재는 더더욱 아니다. 다행히 부모에게 다소 어느정도의 유산을 물려받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평생 놀고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먹고 살 만큼의 교육적 기반을 다질 정도의 재산 뿐이다. 그런데다 그는, 어릴 때 부터 불구인 자신의 발에 대해 컴플렉스가 심했다. 절름발이야말로 필립 케어리가 겪게 되는 최초의 굴레다. 부모가 없다는 것에 대한 위축감과 그러면서도 주목받고 싶은 마음, 백부에게 반항하려는 마음 등은 평범한 사람 누구라도 겪을 수 있는 성장기 감정의 변주들이요, 나이 들면 그 누구라도 그때 일을 떠올리며 얼굴을 붉힐 만한 일들이다.

자신의 발 때문에 괴로워하던 그는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산도 옮길 수 있다는 말 대로 기도를 통해 기적을 얻어 보려 하지만, 그 기도는 절름발이에도 불구하고 행복을 얻기 위한 것일 뿐, 그 다리가 갑자기 멀쩡해지거나 하는 기적의 수단은 되지 못했다. 성직자가 되고자 했던 케어리는 그 일로 신앙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독일로 떠난다. 공인 회계사의 견습으로 돌아갔다가 그만두고, 자신이 미술로 먹고 살 재능이 없다는 것도 확인한 그는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사람들을, 여자들을 만나고 사랑과 환멸과 죽음을 경험했다. 그러던 중 언제나 필립에게 어머니같은 애정을 쏟아붓던 백모가 죽고, 필립은 잠시 백부의 사제관으로 돌아온다.

1권의 내용은 여기까지이다.

내 용만을 보면 한 소년이 성장해가는 성장소설, 18, 19세기 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어떤 것과 같지만, 그보다도 더 마음에 드는 것은 당대에 대한 풍부한 묘사, 그리고 역자주였다. 사실 중학생 때 읽은 “인간의 굴레”에는 대체 무슨 생각인지, “경우에 따라서는 완역본보다 요약본이 더 문학적 가치가 있을 수 있다”는 헛소리와 함께 지금 이 책들의 한 권 분량만 들어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내용은 그대로 들어 있다고 해도 당대에 대한 세세한 묘사 같은 것은 아마 다 잘려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번역가/출판사에 대해서는 글쎄…… 레 미제라블의 하수도 장면을 쳐내면서 문학적으로 더욱 뛰어난 글을 만들고 있다고 자뻑에 취하는 것과 뭐가 다른지.)

사실 1권도 흥미진진하지만, 요약을 하고 보니 볼품이 없다. 이런데도 무슨 요약본이 더 문학적 가치가 있다는 건지. 쯧. 어려서 그리 읽었던 것을 이번에 다시 읽게 되어 정말 반갑다.

2권에 접어들며 필립 케어리는, 이 소설 최악의 인간, 밀드레드에게 놀아나게 된다. 처음에는 호기심이었지만, 곧 그녀에게 빠져들고, 그로 인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어 의사가 되기 위한 공부마저 포기하게 된다. 사랑하지만 그로 인해 번뇌와 괴로움이 끊이지 않는 필립, 그런 필립의 애정을 이용하기만 하며 계속 다른 남자들과 놀아나는 밀드레드. 길에서 구걸하던 그녀를 다시 받아들였지만, 밀드레드는 필립의 세간을 훔쳐 달아나버리기까지 한다. 앞권에서 자살한 프라이스를 끝까지 놓아주지 않은 것, 그리고 필립이 밀드레드에 대해 놓지 못하는 그 감정. 그것은 부질없는 집착이고, 보답받지 못할 감정이다.

그 집착이 그저 집착임을 알았을 때, 사람은 자유를 얻을 길을 찾게 된다.

어린 시절의 필립은 자신의 불행을 과장해서 받아들이는 감수성 예민한 소년이었다. 자라서는, 자신이 화가가 될 수 있다고 믿기도 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일부러 다른 부인에게 인사를 한, 주목받고 관심의 대상이 되고 싶다는 감정은 애정결핍의 소산이자, 자신이 특별하다고 믿고 싶을 때의 감정이다.

필립은 밀드레드와의 사랑이 집착이고 환멸로 가득한 것임을 깨달으며, 크론쇼가 말한 “인생은 페르시아 양탄자”라는 말의 의미와 함께 특별함이 아닌 평범하기만 한 줄 한 줄 짜 나간 인생의 아름다움에 대해 깨달아간다. 그런 그의 앞에 유쾌한 소프 애설니와 그의 가족들이 나타난다.

크론쇼가 페르시아 양탄자를 선물했던 것은 바로 그 것을 말해주려 했던 듯 하다. 직조공이 양탄자의 정교한 무늬를 짜면서 자신의 심미감을 충족시키려는 목적 외에 다른 목적을 갖지 않았듯이, 사람도 그렇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또 사람의 행동이 사람이 선택을 넘어서는 곳에 있다고 믿어야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도 그렇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삶도 나름이 무늬를 짜고 있다고. 어떤 행위는 쓸모가 없는 만큼 꼭 해야 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하는 것 뿐이다. 살아가면서 겪는 온갖 일들과 행위와 느낌과 생각들로써 그는 하나의 무늬를, 다시 말해, 정연하거나 정교한, 복잡하거나 아름다운 무늬를 짤 수 있다.

선택의 능력이 있다는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을 지 몰라도, 또한 현상과 달빛을 함께 얽어 짤 수 있는 환상의 속임수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그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에게 그렇게 여겨지면 그런 것이다. 아무런 의미도 없고,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배경으로 하여, 삶의 거대한 날실에(알지못할 샘에서 흘러나와 알지 못할 바다로 끊임없이 흘러가는 강물과도 같은), 사람은 다양한 실가닥을 선택하여 무늬를 짬으로써 자기만의 만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가장 뚜렷하고, 가장 완벽하고, 가장 아름다운 무늬가 하나 있다. 태어나, 성장하여 결혼하고, 자식을 생산하고, 먹고 살기 위해 일하다 죽는다는 무늬가 그 것이다. 그것들에서도 한결 착잡한 아름다운 무늬를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삶들은-헤이워드의 삶도 그 중 하나이지만-우연이라는 눈먼 무관심에 의해 디자인이 완성되기도 전에 끊겨 버린다. 그래서 그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위안이 편하다. 크론쇼와 같은 삶은 이해하기 어려운 무늬다. 그러한 삶도 그 나름대로 정당하다는 것을 이해하려면 관점이 바뀌고 옛 기준은 바뀌어야 한다.

필립은 행복을 얻고 싶은 욕망을 버림으로써 그의 마지막 미망을 떨쳐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행복이라는 척도로 삶을 잰다면 이제까지 그의 삶은 끔찍했다. 하지만 이제 다른 척도로도 잴 수 있음을 알고 나니 절로 기운이 솟는 듯 했다. 고통도 문제가 아니듯 행복도 문제가 아니었다. 살면서 만나는 행복이나 고통은 모두 삶의 다른 세부적인 사건들과 함께 디자인을 정교하게 만들어줄 뿐이다. 한순간 그는 삶의 우연사들을 넘어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들은 전처럼 그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무슨 일이든 이제는 삶의 무늬를 더 정교화하는데 보탬이 되는 동기가 될 뿐이다. 종말이 다가오면 그는 무늬의 완성을 기뻐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예술품이리라. 그 예술품의 존재를 알고있는 사람이 자기 뿐이라 한들, 자신의 죽음과 함께 그것이 사라져버린다 한들 그 아름다움이 결코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필립은 행복했다.

의사와 환자로서 처음 만났던 애설니는 인생을 사랑하는 남자였고, 그의 가족들 역시 햇살처럼 밝고 유쾌한 이들이었다. 라이스 푸딩처럼 보드라운 뺨을 지닌 샐리를 사랑하게 된다. 여행을 떠나려 했던 그는 샐리와 그의 가족들을 배신할 수 없어, 처음에는 자기희생적인 마음으로 샐리와 결혼하겠다고 생각한다. 자기희생이라니. 예전에 “아줌마”라는 드라마가 있었는데 거기서 주인공 아줌마의 남편 장진구가 친구 여동생을 술김에 덮쳐놓고는 결혼하고서는 자기희생이라는 둥, 기층민과 지식인의 결합이라는 둥, 그런 씨나락 까 먹는 소리를 했던 것이 살짝 떠올랐다. 이자식 아직 철 안 들었구나 싶겠지만, 바로 그 결혼 이야기를 꺼내려 할 때, 샐리는 아이가 생겼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필립은 깨닫는다.

아메리카(낙원)는 다름아닌 바로 이곳에 있다.
생각해보면 나는 그동안 남의 말과 글이 주입해온 이상을 좆아왔을 뿐 내 마음의 욕망을 따른 적이 한번도 없었던 것 같다. 자신의 행로는 언제나 어떤 것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좌우되었을 뿐 내 마음이 진정 원하는 바를 따른 적이 없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나는 이 모든 거짓을 내던져 버렸다.

나는 지금까지 미래만을 염두에 두고 살아왔다. 그래서 현재는 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버리고 말았다.
자신의 이상?  나는 의미없는 삶의 무수한 사실들로 복잡하고 아름다운 무늬를 짜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가장 단순한 무늬, 그러니까 사람이 태어나서, 일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죽음을 맞는 그 무늬가 동시에 가장 완전한 무늬임을 깨닫지 않았던가?
행복에 굴복하는 것은 패배를 인정하는 것인지도 몰랐지만 그것은 수많은 승리보다 더 나은 패배였다.

한 불행청년이(스스로도 불행했지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더 컸고, 미숙하고 방황하여 자신을 통제하지 못했던) 평범하고 행복한 인생을 지향하는 길을 그린 이 이야기를, 어찌 손에서 쉽게 놓을 수 있을까. 앉은 자리에서, 더러는 엉뚱한 것들을 연상하며 낄낄거리고 더러는 짜증을 내며 읽어나가 놓고는, 이벤트에 참여하려 보니 어디부터 어떻게 감상문을 끊어야 할 지 몰라 괴로웠다. 난감했지만, 다시 읽을 때가 되었고, 다시 읽어서 좋았다. 이런 책이라면 몇 번이라도.

 

ps) 그러고 보니 페인티드 베일도 그렇고. 씨줄과 날줄, 그 섬유의 직조에 인생을 비유하는 것을 이 아저씨는 퍽 좋아했던 걸까. 아, 물론 필립 케어리가 아니라 서머싯 몸 선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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