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읽기-022] 제인 에어 (샬럿 브론테) 민음사 세계문학 109, 110

제인 에어
제인 에어
제인 에어

 

중학교 예비소집에 갔더니 학교 앞 문구점 겸 서점에서 손바닥만한 책들을 팔고 있었다. 엄마가 초등학교 같이 나온 친구들이랑 뭐 사먹으라고 돈을 주셨는데, 나는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하는 착한 어린이가 아니었다. 그날 나는 친구들과 뭘 사먹었다고 엄마가 판단할 만큼 밖에서 빙빙 돌며, 문구점에서 산 문고판 제인에어를 읽고 있었다.

중학생이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용돈이 한 주에 5천원, 조금(?) 현실적으로 올랐고, 그 현실적으로 오른 용돈은 삼중당이나 일신문고, 범우문고를 모아들이는 데 쓰였다. 세월이 지나고 책이 낡기도 하고 도서관에 기증하거나 동생들이 학교에 가져가거나 잃어버리고 했지만, 여튼 책을 사거나 집에 오는 길에 서점 구석에 앉아서 문고본들을 한권씩 섭렵하거나 했다. 국딩과는 달리 중딩은 조금 해가 지고 늦어진 다음에 집에 가도 되었으니까. (그때도 학원 다니는 친구들은 많았지만 우리집은 학원에 보내줄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학교에서 집까지 걸어서 10분 거리면서 왜 이렇게 늦었느냐고 하시면 6시에 끝나던 우수반 핑계를 대었는데, 우리 학년 주임이 아버지랑 술먹기 전까지만 해도 아주 유용한 거짓말이었다.

여튼 중딩이의 거짓말은 그렇다고 치고,

초반의 제인과 리드 부인의 관계 말인데, 사실 어린애가, 자기가 학대당한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다. 그게 엄격함인지, 아니면 정말로 학대인지는 커 봐야 아는 거다. 특히 제인은 감수성이 풍부하고, 음악이나 미술 쪽의 재능도 있는데다 자존심 강하고, 겉으로는 쌀쌀맞게 굴어도 사실은 애정이 많은 성격. 소위 자의식 강한 아이다. 그런 아이의 판단은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다가, 소설 전체의 딱 중간, 리드 부인의 죽음 대목을 읽으면서는 마구 분노했던 기억이 있다.

브로클허스트 씨의 로우드 학교(그래, 이 학교 이름은 이제는 만화가 임주연님의 “씨엘”에서 마법학교 이름으로 써먹으면서 그 처음에 받았던 비참한 느낌이 많이 순화되긴 했지만 브로클허스트라는 이름이 주는 싸늘한데다 타 버린 죽이나 썩은 재료로 만든 음식의 느낌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에서 어린 제인이 고생하는 것도 마음이 아팠지만, 리드 부인이, 제인이 잘 되는 꼴은 보기가 싫었기 때문에 그의 숙부 존 에어 씨가 제인을 찾아 왔을때 죽었다고 말해버렸다고 하는 그 대목에서는, 이런 여자는 목을 조르거나 베개로 덮어 죽여버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몇 페이지 안 지나 그 여자는 죽었다)

이, 민음사판 제인 에어 1권은 바로 리드 부인이 그 말을 하는 데 까지 진행된다.

훌륭한 번역이라고 하지만, 내용을 적확하게 번역했는지는 몰라도 읽으면서 눈에 거슬리는 대목이 꽤 있었다. 정말 훌륭한 번역인지, 그동안 나온 제인 에어 번역이 다 개판이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사실 로체스터 같은 타입은 질색이므로, 대체 어쩌자고 제인같이, 여자 혼자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험난한 저 빅토리아 초, 중기 시대에도 능히 혼자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 슬기롭고 줏대있는 여성이 저런 놈팽이에게 넘어가는지, 그게 다, 어려서 조실부모하고 리드 부인같은 인간에게 학대당하면서, 겉으로는 냉랭하고 딱딱한 껍질을 쓰고 있으면서도 사실은 자신의 부드러운 내면을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그런 식으로 성격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돈이 많은 신사라고 해도 로체스터 같은 놈을 무엇에 쓴 단 말인가.

사실 로맨스를 안 좋아하는데다가, 폭풍의 언덕이라면 몰라도 제인 에어는, 제인이 손필드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리고 제인이 혼자서 살아가려는 부분들이 좋았지, 로체스터와 러브러브하는 건 다 눈에 거슬렸다. 왜 저딴 놈에게 멀쩡한 여자가! 뭐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사실은 제인이 자신의 극사실적인 초상화를 그리고, 다시 잉그램 양의 초상화를 화려하게 그리며 두 그림을 비교해 보며 로체스터에 대한 연심을 접으려는 부분을 보며 마음이 아프다가도.

그래, 저딴 남자따위 제발 차버려라.라고 기원하는 나를 발견하게 되는 거다.

2권은, 리드 부인의 장례를 마치고 남은 두 사촌을 돌아본 뒤 손필드로 돌아온 제인에게, 로체스터가 구혼하며 시작된다. 로체스터는 자기 말로는 잉그램 양의 마음을 시험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사실은 아마도 잉그램을 떼어버리고 제인과 잘 해볼 참으로, 자신의 재산이 알려진것보다 훨씬 적다는 소문을 퍼뜨렸고, 그 뒤에 돌아오는 잉그램 양의 냉랭함을 보고 제인에게 구혼한다.

이것부터가 나는 재수없다는 말이다. 기쁠때나 슬플때나 가난할때나 같이 있어 줄 여자를 만나면 좋은 거지만, 제인은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 아닌가. 제인이, 정말 그 마데이라에 살아있다는 숙부를 만나서 조금이라도 배경이 생긴다면, 하고 생각하는 것도, 로체스터와 결혼하기로 하고도 가정교사 일을 계속하는 것도, 그가 사주는 호화로운 것들을 거절하는 것도, 어쩌면 로체스터가 저런 식으로 자신을 무시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말이다. 바퀴벌레 썩은 쓰레기같은 것. 그런데다, 잉그램 양과 제인을 놓고 양다리를 걸치며 간을 보던 그는, 알고 보니 부인이 살아있는 중혼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래놓고는 그 사실을 밝힌, 자신의 처남인 메이슨을 교회에서 때리기까지 한다.

이 결혼 안 되어서 정말 다행이다, 제인 에어.

그래놓고도 정신 못 차린 로체스터는, 사랑이라는둥, 저 여자와 이 여자를 비교해 보라는 둥 하고 헛소리를 하다가, 제인에게 함께 여행을 떠나자고 권한다. 말이 좋아 사랑의 도피요 밀월이며 결혼이지, 법률상 중혼이고 제인을 정부 취급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가 만났던 많은 여자들보다는 좀 더 성실하고 끈질긴 구애였을지는 몰라도, 추구하는 결론은 같다. 제인은, 메이슨을 통해서 자신의 숙부와 연락이 닿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손필드를 떠난다. 남의 눈에 띄지 않으려 단촐하게 짐을 꾸리고 나왔지만, 마차에 짐을 두고 내리는 바람에 빈털터리가 되어 버린다. 그리고 도착한 마을에서, 제인은 목사인 세인트 존과 그의 두 누이동생, 리버스 가의 남매들을 만나게 된다.

미남이고 지적이며 침착한 세인트 존은, 로자몬드 올리버 양을 사랑하고 있지만 그보다는 전도에 대한 자신의 사명을 생각한다. 로자몬드의 초상화를 그려 주던 제인이 이와 닮은 것을 그려 주겠다고 말하며 로자몬드와 결혼할 것을 권하던 중, 그는 가명을 쓰고 자신들 곁에 머무르고 있던 제인이 존 에어의 조카이자 자신들의 사촌임을 알게 되고, 제인에게 2만파운드의 유산 상속자가 되었음을 알게 된다. 졸지에 가난한 고아에서 부유한 상속녀가 된 제인은 그 2만파운드를 자신과 마찬가지로 존 에어의 조카들인 리버스 가 남매들과 똑같이 나눈다. 전도를 할 자금을 얻게 된 세인트 존은, 오지에서 버텨낼 수 없을 로자몬드 대신, 현실적이고 생활력 강한 제인에게 청혼한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똑같아. 그런데다 집요한 것 까지 로체스터 스럽다. 제인의 남자 복은 정말 형편없다는 생각이 들 무렵, 제인은 집에 불이 나 재산을 잃고 화재 사고로 불구가 된 로체스터의 소식을 듣고 그를 만나러 간다. 그리고 두 사람은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다. 이 한심천만한 로체스터는 그 와중에도 세인트 존과의 관계를 의심하며 제인에게 가서 그의 아내가 되라고 튕기기까지 하지만, 제인은 순종적인 여자의 모습을 보여주며 자신의 의지로 로체스터를 따른다.

중학생 때, 내가 이 소설의 독후감을 썼을 때도 나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이 소설을 비판했다. 소위 “깠다”고 말할 만큼.

멀쩡한 여자가, 자신을 그렇게 하찮게 대하고 놀리고 시험한 그런 남자, 그것도 자신을 속이고 정부로 삼으려 했던 남자에게 순순히 돌아가는 것을 봐도 그렇고. 그 과정에서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는 것이 사랑 때문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나는 참, 복잡했다. 사랑하니까 저럴 수 있다고 머리로는 생각하면서도, 황당했다. 그 시대 연애소설의 한계일지는 모르지만, 나는 지금도 바로 저 로체스터 타입의 남자들, 강압적이고 돈많고 냉혹하며 여자 무시하면서도 그녀에게만은 칠렐레 팔렐레 헬렐레 하면서도 끝까지 지랄하는, 결정적으로 중혼이 알려진 뒤에도 끈질기게 구혼하는, 소위  양심없는 유부남 남자 주인공이 나오면 바로, 책을 덮어버린다. 그 시대를 놀라게 했을 만한 연애소설이자, 강한 여성을 그린 작품인 동시에, 그 시대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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