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읽기-006] 인생의 베일(서머싯 몸) 민음사 세계문학 137

인생의 베일

인생의 베일
인생의 베일

법정 변호사이고 왕실 고문 변호사이기도 한 아버지. 그러나 어머니는 왕실 고문 변호사라는 영광 뒤에 당연히 따라붙는 이런저런 제약으로 인해 수입이 줄어버린 남편을 가혹하게 몰아세우고, 두 딸을 시집 잘 보내는 것에 희망을 건다. 두 딸들 역시 아버지를 돈 벌어오는 사람 정도로 생각하며 무시한다. 아름답고 경박한 키티는 사교계에 나가면서부터 결혼 시장에 적극적으로 나서라는 어머니의 압박을 받지만, 어째서인지 그녀에게 청혼하는 것은 젊고 그녀의 어머니의 관점에서는 아직 변변치 못한 놈들 뿐. 오히려 미모가 떨어지는 동생이 먼저 결혼하게 된다는 것을 안 키티는 조바심을 낸 끝에, 그녀에게 수줍지만 꾸준히 관심을 보이던 세균학자 월터 페인과, “동생의 결혼식보다 몇달 먼저” 결혼해버린다. 시간순으로는 이 이야기가 맨 처음. 하지만 내용 전개상으로는 그렇게 결혼한 키티가, 남편이 부임한 홍콩에서 만난 총독부 차관보 찰스 타운센드와 불륜을 저지르는 데서 시작한다. 침착하고 과묵한 월터는 그 불륜을 목격하고, 그녀에게 화를 내거나 윽박지르는 대신 그녀를 데리고, 콜레라가 창궐한 중국의 오지에 부임하겠다고 선언한다. 키티는 월터가 자신과 이혼해주면 찰스는 아내와 이혼하고 자신과 결혼할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찰스는 아내를 버릴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다. 식민지에 온 젊은 부인들과 바람피우는 것 정도는 예사일이었던 찰스에게 있어 키티는 그저 정부들 중 하나에 불과했던 것. 월터는 처음부터 간파했지만 키티는 믿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그 진실과 함께 키티는 오지로 끌려간다.

예전에 마이클럽이나 미즈넷을 달구던 글 중에 그런 글이 있다. 마이클럽의 캡사이신님이 쓰신 “유부남과 사귀는 아가씨들에게”.

http://bbs3.miznet.daum.net/griffin/do/miztalk/miztoc/love/lovetalk/read?bbsId=00001&articleId=1310425

초반에서 키티의 철없는 행동을 보고 있으면 딱 그 글이 떠오른다. 남편은 걸림돌이고 찰스는 그저 애들 엄마일 뿐인 아줌마랑 애정없는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찰스 그 인간도 그저 그 자리에 오를 때 까지 아내가 내조해서 올려놓은 것이고 사실은 폼만 잡고 실속은 없는 남자. 그런데다 아내의 수완도 대단한데다 아내는 남편이 바람둥이인 것도 알고 남편의 정부들을 비웃기까지 하는, 어떤 의미에서는 통이 크다고 해야 하나. 그런 여장부다. 그야말로 키티만 모른 것이다. 중국의 오지로 끌려가는 와중에도 키티는 찰스가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고, 월터에 대한 미움을 품는다.

하지만 아내에게 배신당한 월터의 슬픔은, 키티가 생각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자기 혐오로 이어진다. 월터는 키티가 자신을 사랑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라 동생에게 밀리기 싫어서 결혼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월터는 키티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 불륜이 한번 실수가 아니었고, 자신과 이혼하고 찰스와 결혼하기 위해 차관보인 찰스의 사무실까지 달려가 아내와 이혼해달라고 외치는 키티의 철없는 행각을 보며 그는 조금씩 망가져간다.

 “나를 경멸하나요, 월터.”
“아니.”
망설이는 그의 목소리가 이상했다.
“나 자신을 경멸해.”
(중략)
“왜 스스로를 경멸하죠?”(중략)
“당신을 사랑했으니까.”
그녀는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돌렸다. 그의 차갑고 흔들리지 않는 꿰뚫는 시선을 감당할 수 없었다 . 그의 말이 무엇인지 이해가 갔다. 그녀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대답했다.
“그건 부당해요. 내가 어리석고 경박하고 천박하다고 해서 날 비난하는 건 공평하지 않아요. 난 그렇게 자랐어요. 내가 아는 모든 여자들은 다 그래요. 교향곡 연주회가 지루하다는 사람에게 음악에 대한 기호가 없다고 힐책하는 것과 같아요. 내가 갖지 못한 품성을 내 탓으로 돌리고 나를 비난하는게 공평한가요? 난 내가 아닌 존재인 척 하면서 당신을 속이려고 한 적 없어요. 난 그냥 예쁘고 명랑해요. 장터 노점에서 진주 목걸이나 담비 외투를 찾지 마요. 주석 트럼펫이나 장난감 풍선을 찾으라고요.”
“난 당신을 비난하지 않아.”

오지에서 키티는 자신의 남편이 수녀들에게, 그리고 환자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이고, 어린 아이들에게 진실한 애정을 쏟는 애정 넘치는 사람임을 알게 된다. 사방에 깔린 죽음의 공포 속에서도 의사로서 세균학자로서 현실과 싸워나가는 월터. 자신을 병들어 죽게 하기 위해 이곳에 데려왔다고 생각하고 그를 증오했던 마음은 조금씩 월터에 대한 존경으로 바뀌어 나가고. 키티는 수녀들에게 부탁하여 고아가 된 아이들을 돕는 일에 나선다.

그리고 다음 날 바보 아이가 그녀에게 다가와 또 그녀의 손을 만지작거릴 때 키티는 용기를 내서 그 커다란 민둥 두개골에 손을 얹고 쓰다듬어 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아이가 바보의 괴팍함이 발동했는지 그녀를 떠났다. 아이는 그녀에게 흥미를 잃었는지 그날과 그 이후로 그녀에게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키티는 자기가 뭘 잘못한 건지 어리둥절하기만 해서 미소와 손짓으로 아이를 꼬드겨보려고 했지만 아이는 고개를 돌리고 그녀를 못본 체 했다.

바보 아이는, 키티와 마찬가지다. 사랑을 갈구하지만 사랑을 알지 못하고 자신을 향해 내민 손을 잔인하게 외면한다. 아이에게 외면당하는 키티의 모습은 곧 월터 그 자체다. 월터가 그렇게 많은 것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소위 “가는 정이 있으면 오는 정도 조금은 있기를” 바란 것이 고작이다. 보답받지 못한 사랑, 배신당한 결혼. 경박함을 싫어하고 진지하며 학구적인 신사인 월터로서는 버거운 일들. 그리고 낮은 자들에 대한 봉사와, 신비롭도록 아름다운 이곳의 자연 풍경 속에서 키티는 조금씩 변화해간다. 대승적인 차원의 관계, 대자연 속에서 자신과 월터의 일, 그리고 누가 누구와 잤는가와 같은 일이 아주 작은 일 처럼 느껴지는 신비로운 느낌. 찰스에 대한 존재감도 흐려지고 그 어리석은 불륜을 후회하며, 아이들과 환자들에게 쏟아지는 월터의 사랑에 이제 자신의 몫은 없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느끼는 키티는 분명 홍콩에서와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월터에게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이봐요, 우리 바보짓은 이제 할 만큼 하지 않았나요? 우린 서로에게 애들처럼 부루퉁해 있어요. 키스하고 친구가 되는 게 어때요? 우리가 연인이 아니라고 해서 친구가 되지 말란 법 없잖아요!”

하지만, 애정관계에서 가해와 피해를 굳이 나눈다면, 키티는 가해에 속한다. 키티가 싫다는 것을 억지로 결혼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월터가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이용한 것은 키티였다. 그리고 어떤 상황이건 내 입장에서는 가해자가 저런 식으로 나오면 참 싸가지가 없게 느껴진다. 피해자가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해도, 가해자가 와서 “자 어서 나를 용서하란 말야”라고 강요한다면 싸대기라도 날리고 싶어지는 것은 인지상정. 가해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진심을 다해 용서를 구하는 것 뿐이다. 사실 키티는 마음을 낮추고 자신이 이기적이었다는 것을 알았으며 월터가, 과묵하고 진지해서 그렇지 사실은 애정이 넘치는 속이 꽉 찬 남자 99.9…. 라는 사실도 깨닫긴 했지만, 그랬다면 그녀는 그것을 좀더 표현했어야 했다. 월터의 닫힌 마음을 열기 위해 노력하거나 용서를 구하는 일 없이, 아직은 그저 아무 말 없이 애정을 원하기만 하던 키티. 그녀에게 충격적인 일이 벌어진다. 그녀가 임신을 한 것. 그리고 그 아이가 대체 남편인 월터와 불륜 상대인 찰스 중 누구의 아이인지, 키티로서는 알 수 없었다는 것.

“당신 얼마나…… 언제 출산 예정이지?”
그의 입에서 어렵게 나온 말 같았다. 그의 목도 그녀만큼 타는지 바싹 말라 있었다. 성가시게 입술이 바라라 떨리는 바람에 간신히 만들어  낸 그녀의 대답은 그가 목석이 아니라면 동정심을 자극할 만한 것이었다.
“두 달에서 세 달 정도 된 것 같아요.”
“내가 아이 아버지인가?”
그녀는 훕 숨을 들이켰다. 그의 목소리에 파르르 떨리는 전율의 그림자가 느껴졌다. 일말의 감정도 동요도 허락하지 않는 그의 냉철한 자제력이 그토록 흔들리다니 두려운 일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홍콩에서 보았던 바늘이 진동하는 어떤 기계가 생각났다. 수천 킬로미터 밖에서도 수천 명의 생명을 앗아 갈 수 있는 지진을 감지한다고 했다. 그녀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유령처럼 창백했다. 그렇게 낯빛이 해쓱한 것은 전에도 한두 번밖에 보지 못했다. 그의 시선이 아래로 양 옆으로 흔들렸다.
“그래?”

그리고 그 아이가 월터의 아이라고 말했다면, 월터는 믿었을 것임을 키티는 알고 있다. 그가 자신을 죽이려고 앙심을 품고 여기 끌고 온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용서를 구하면 받아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키티는 그렇게 대답하지 못한다. 아직도 월터를 사랑하는 자신을 깨닫지 못한 채, 키티는 월터를 사랑하지는 않지만 지금은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댈 수 있기를 갈망한다. 하지만 임신한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대답을 들은 남자가(불륜을 저지른 아내가 그렇게 말했다면 그 아이가 자기 아이일 가능성을 고려할수 있는 남자는 극히 드물 것이다) 그런 서비스를 할 리가. 그리고 파국이 일어난다. 월터의 입장에서는 아내가 다른 남자와 불륜을 저지른 것만으로도 견디기 어려운 고통일텐데, 그 아내가 불륜 상대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생각한  그 시점에서 이미 파국이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월터는 콜레라에 걸려 사망한다. 사랑한다고 뒤늦은 용서를 구하는 키티에게, “죽은 건 개였어.”라는 올리버 골드스미스의 시 “미친 개의 죽음에 대한 애가”의 마지막 구절을 중얼거리며 숨을 거두는 월터. 그리고 워딩턴은 키티에게 자신이 품은 의혹에 대해 설명한다.

 “그는 매우 신경이 날카로운 상태였습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이해할 수 없더군요. 내가 이해한 바로 부군은 그가 하던 실험 중에 감염되었더군요. ”
“그는 언제나 실험을 했어요. 그는 의사라기보다는 세균학자였으니까요. 그가 여기로 오고 싶어 했던 게 그 때문이었죠.”
“하지만 난 도대체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외과의 말이, 그가 실수로 감염된 것이 아니라면 그가 스스로를 실험 대상으로 삼았을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영국으로 돌아가는 길, 일단 홍콩에 도착한 키티는 찰스와 그 아내의 도움을 받아 타운센드 가에 머물고, 찰스의 아내인 도로시가 집을 비운 사이 다시 한 번 찰스와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키티는 이제 찰스에게 증오와 경멸을 느끼고, 그런 찰스와 관계를 맺은 자기 안의 짐승에게 혐오를 느끼며 도망치듯 영국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돌아오자마자 키티는, 늦도록 결혼하지 못하던 자신을 짐짝처럼 여기며 이제 과부가 되어 돌아오는 딸을 피하려 들던 어머니가 지병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친정집에 돌아와 아버지와 대면하고, 키티는 아버지가 감추려 하는 희미한 안도감을 느낀다. 법정변호사로서 존경받을 만한 위치에 있었으면서도 늘 세속적 야욕에 가득차 남편을 돈벌어오는 기계나 출세의 수단으로 여기며 경멸하고 군림하던 아내에게 짓눌려 살아야 했던 아버지는 30년동안 착하고 성실한 남편으로서 아내를 비난하는 말 한 마디 하지 못했고, 남편으로서 마땅히 애도해야 하는 이 순간에 문득 떠오르는 안도감에 당황하고 있었다. 마치 성실하고 단정했던 키티의 남편, 월터와 같이.

“담배 안 피우실 거예요?”
“네 어머니가 식사 후에 파이프 냄새피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전쟁 끝에 난 시가를 포기했지.”
그의 대답에 키티의 가슴이 시려왔다. 예순 살이나 먹은 남자가 자신의 서재에서 자기가 원하는 것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다니 이렇게 고약한 일이 또 있을까.
(중략)
키티는 자신이 아버지의 애정을 얻기 위해서 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집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적이 없었고 그저 당연한 존재였으며 가족에게 더 화려한 것을 제공할 수 없다는 이유로 다소 멸시를 받아야 했으며 돈을 벌어오는 사람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녀는 그가 아버지이기 때문에 그녀에 대한 그의 사랑을 당연시했고 그 때문에 그녀에 대한 그의 공허한 마음을 알게 되자 충격을 받았다. 그들 모두가 그를 지겨워한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지만 그도 똑같이 그들을 지겨워한다고는 한번도 생각지 못했다.

어머니의 임종에 임박해서야, 멀리 바하마에 판사로 부임하게 된  아버지. 아버지는 이제 30년만에 아내와 두 딸들이라는 족쇄를 벗고 자유로워지려 한다. 그랬기에, 곧 아이를 낳게 될 키티가 그곳으로 아버지를 따라가겠다고 하자 아버지는 당황한다. 의무감으로 승낙하려는 아버지에게 키티는 처음으로, 용서를 구한다. 자신의 아버지에게 진작에 구했어야 하는 용서를, 월터가 살아있을때 구했어야 하는 용서를. 피해자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자신을 내려놓는 용서를 구한다. 그것은 늦었으나마 키티가 이제 누군가를 사랑할 준비가 되었음을, 아버지나 남편에게 그저 의지하는 어린 소녀가 아니라 한 성숙한 여성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월터 입장에서는 너무 늦긴 했지만, 인생은 기니까.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