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읽기-002]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미셸 투르니에) 민음사 세계문학 91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읽으면서 로빈슨 크루소 완역본을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대학 도서관에도 아동용밖에 없었다. 교육대학이란 이래서.

이야기의 중반까지, 그러니까 프라이데이 아닌 방드르디가 나타날 때 까지는 우리가 알고 있는 로빈슨 크루소와 비슷한 형태로 사건들이 흘러간다. 어디까지나 비슷한 형태일 뿐, 동일한 형태는 아니다. 원작의 로빈슨 크루소가 자연을 뜻대로 길들이려 하고 이곳에 정착하여 일단 살아갈 방법을 생각하며, 어린 시절에 무인도에 대한 일종의 환상이나 로망같은 것을 품게 하기 충분할 만큼 잘 지내고 있던 것에 비해, 이 이야기의 로빈슨은 그야말로 프랑스 작가의 손끝에서 나온 인물답다.

생존을 위해 노력하지만, 그보다는 탈출을 위해 노력하던 로빈슨은, 자연의 한가운데에 혼자 떨어졌으면서도 점차 이 섬을 문명화하려 한다. 예복이나 문명사회를 증명할 만한 것들을 따로 보관하여 신전과 같이 꾸미고, 농사나 수렵과 같은 생산활동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짜증을 내고, 혼자 먹고 살기에는 과하게 많은 식량을 비축하며, 높은 동굴 안에 폭약을 숨겨둔다. 그러면서도 섬을 어머니로 생각하며 동굴 속, 사람 하나가 들어 앉을만한 틈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로빈슨은, 어느정도 먹고살만해지자 마자 다양한 사유에 빠져든다. (프랑스 작가의 인물답다고 한 것은 이 점이다)

 이 정도의 깊이에 이르면 스페렌차의 여성적 본질에 모성의 모든 속성들이 축적되는 모양이었다. 공간과 시간의 경계가 미약해지면서 로빈슨은 어느 때보다도 더 그의 어린 시절의 잠든 세계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그 생명의 액체를 빨기 위하여 그 구멍으로 목마른 입술을 갖다 대면서 그는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감은 눈꺼풀 뒤에서 모세의 약속이 불길처럼 솟는 것이 보였다.
-이스라엘의 아이들아, 내가 너희들을 젖과 꿀이 넘치는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그러면서도 그는 자기 속에 젖과 꿀이 넘치는 반면 스페렌차는 반대로 그가 그 섬에 부과하는 저 끔찍한 모성적 사명속에서 기진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더 이상 모른 체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을 보호하는 어머니와 같은 “섬”은, 로빈슨의 다양한 활동으로 점차 문명세계에서의 규칙 하에 놓인다. 그의, 섬에 대한 지배욕이 단적으로 드러난 것이 바로 스페렌차 섬 헌장과 물시계다. 그는 섬을 개간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자연을 바꾸어 나가며 자신 외에도 수많은 생명들이 살고 있는 이 섬 자체를 “지배”하려 든다. 자기 자신을 스페렌차 섬의 “총독”이라고 부르는 것은, 자신이 이 섬의 지배라자고 하는 하나의 주장이나 다름없다. 홀로 고립된 여자 없는 삶 속에서 그는 처음에는 안에 이끼가 핀 나무 틈새에서, 그 다음에는 이 섬 자체와 성교하고, 섬은 자신의 지배를 받는 “아내”이고, 자신은 그를 지배하는 “남편”이라고까지 생각한다.

 여자가 없으므로 나는 직접적인 사랑을 할 수 밖에 없는 처지다. 여자의 길을 빌려 풍요한 우회를 할 수 없는 나는 나의 마지막 처소이기도 할 그 대지 속으로 곧장 들어간다. 장밋빛 골짜기(combe)속에서 나는 무엇을 했던가. 나는 나의 성기로 나의 무덤(tombe)을 팠고 그 속에서 죽었다. 관능이라는 이름을 가진 잠정적 죽음을 죽었다. 이렇게 하여 나는 나를 싣고가는 변신과정 중에서 하나의 새로운 이정을 건너섰다는 것 역시 적어두고자 한다. 왜냐하면 여기에 이르기까지는 몇 년이 걸렸으니까 말이다. 내가 이 기슭에 던져졌을 때 나는 사회의 틀로부터 빠져나오고 있었다. 태어날 때 부터 향지성을 가진 성의 본래 기능을 딴 곳으로 돌려가지고 자궁 속으로 접어들게 하는 메커니즘이 내 뱃속에 만들어져 있었다. 그 결과, 진짜 여자이든가 아무것도 아니든가, 두 가지 중 하나밖에 모르는 상태가 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고독 때문에 차츰차츰 단순해졌다. 그런 식의 우회로는 더 이상 아무런 대상도 찾을 수 없게 되었고 메커니즘은 무너져버렸다. 처음으로 장밋빛 골짜기 속에서 나의 섹스는 그것의 원초적인 요소인 땅을 만난 것이다. 내가 이 비인간화 과정의 새로운 발전을 실현하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나의 다른 자아가 논을 만듦으로써 스페렌차의 지배라는 가장 야심적인 인간 작업을 성취했다.

그런 그의 일상에 순종적이고 착한 노예 프라이데이가 아닌, 자유롭고 천진난만한 방드르디가 나타난다. 그는 로빈슨의 규칙을 따르는 듯 보이다가도 어느새 새로운 일을 벌이며, 그의 생각으로는 무쓸모한 것 – 로빈슨이 아버지를 추억하며 선인장들을 옮겨심은 정원 – 에 역시 무쓸모한, 문명사회의 화려한 옷가지나 보석들을 뒤집어 씌우기도 하고, 담배나 대지와의 성교 등, 로빈슨의 남성성, 우월성, 지배욕으로 상징되는 것들을 자신도 함께 하기도 한다. 급기야 로빈슨 몰래 그의 성전-문명사회의 물건들을 모아 둔-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로빈슨이 다가오자 방드르디는 담배불을 뒤로 던져버리고, 그 일로 숨겨둔 폭약들이 폭발을 일으키며 로빈슨이 섬에 건설한 문명 비슷한 것은 완전히 파괴되고 만다.

이후 주인과 노예 관계였던 로빈슨과 방드르디는 대등한 관계를 이루고, 서로 역할을 바꾸거나 화가 나는 일이 있으면 각각 로빈슨과 방드르디라고 이름을 붙인 허수아비를 때리거나 하며, 천진난만한 세계로 들어간다. 로빈슨은 바람과도 같고 바람을 사랑하는 방드르디가 어쩌면 로빈슨 그 자체와도 같은 앙도아르라는 야생 염소의 가죽으로 연을 만들거나 그 뼈로 바람의 하프를 만드는 모습을 보며 신비함을 느낀다. 그 신비함, 원초적인 원소로 돌아가는 그 모습은 자연에 대한 찬미로, 햇살에 대한 감사로 이어진다. 지금까지도 문명인의 태를 유지하려 옷을 입고 다니던 로빈슨은 방드르디와 함께 햇살 아래에서 뛰놀고, 그의 살갗은 그을어간다.

 왜냐하면 바람의 하프는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받아 노래하는 원소적인 악기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간속에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송두리째 순간 속에 새겨지는 음악을 연주하는 악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악기의 줄을 여러 개로 할 수도 있고, 각각의 줄에서 원하는 음조가 나오도록 할 수도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바람이 악기를 건드리기만 하면 즉시 첫 음조에서 마지막 음조까지 한꺼번에 터져나오는 순간 교향곡을 작곡하는 것이다.

나의 우라노스적 사랑은 그와 반대로 내게 생명력을 가득 불어넣어 준다. 그 생명력은 하루 낮과 밤 동안 줄곧 내게 힘을 공급한다. 이 태양적 성교를 구태여 인간의 언어로 번역해야 한다면 나는 여성으로서, 하늘의 아내와 같은 것으로 분류 규정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 중심주의는 이치에 어긋난다. 사실상 방드르디와 내가 도달한 이 최고의 경지에 있어서 성의 차별은 초월되었고, 인간적인 말로 표현해 볼 때 내가 지고한 별의 잉태를 위하여 내 몸을 열어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방드르디는 비너스와 동일화될 수 있다.

시간이란 연속적으로 흘러가는 걱이고 순간순간에 의미가 다 부여되지만, 문명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은 여기에 불완전한 분절성을 부여한다. 이것이 바로 디지털이다. 물시계로, 하루하루 그어가는 빗금으로 이 섬에서의 삶에 불완전한 디지털을 부여했던 로빈슨은, 이제 그 흘러가는 시간의 의미조차 잊고 방드르디와 함께 햇살 아래에서 자유로워진다. 자신의 오만을 버리고 태양 앞에 스스로 경배하며 그는 자신이 자연을 지배하는 자가 아닌 자연 그 자체임을 느낀다. 그런 그의 앞에 영국에서 온 화물선 화이트버드 호가 나타난다. 로빈슨이 탔던 버지니아 호가 좌초한 지 28년 2개월 19일만의 일이었다. 시간을 잊고 살아가던 로빈슨은, 밖에서의 시간이 그렇게 흘렀다는 사실을 듣자마자 늙어버린 듯한 기분에 빠진다. 문명 사회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그들이 무엇을 위해 추구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피상적인 욕망에 매달리는 것을 보며, 그들이 지성은 가졌으나 어리석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이 다시 문명 사회에 섞여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실 태양이란 거대한 불꽃 덩어리가 아닌 그 무엇이며 그 속에는 정신이 담겨 있어서 태양을 향하여 스스로를 열어보일 줄 아는 존재들에게는 영원의 광휘를 비추어주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그가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는가?

늙고 상처입은 로빈슨은 자신이 섬에 남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화이트버드 호는 떠난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그동안 자신에게 존재하지 않았던 28년이 어깨 위로 내려앉은 것을 깨달은 것은, 바람 그 자체를 구현한 듯한 범선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방드르디가 화이트버드 호를 따라가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였다. 시간과 영원 사이의 양자택일 따위는 이제 없다. 그에게는 단 하나의 구원만이있을 뿐이다. 로빈슨은 자신이 섬에 잉태된 듯 몸을 웅크렸던 그 바위 틈으로 향한다. 그곳에는 화이트버드 호에서 그가 보았던, 구박데기인 소년 선원이 숨어 있었다. 로빈슨은 그에게 목요일=제우스=태양을 의미하는 죄디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영원으로의 회귀. 늙고 홀로 된 로빈슨이 결코 성취할 수 없었던 “다음 세대”가 섬에 도착한 것으로 보아도 될 것 같다.

로빈슨이 섬에서 프라이데이를 문명화하며 살아가는 이야기와 달리,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는 방드르디의 담뱃불에 화약이 폭발하여 로빈슨이 일군 문명이 박살나는 데 까지로 끝난다. 이후 투르니에가 그려나는 로빈슨과 방드르디의 날들은 천국도 지옥도 아닌, 크리스트교의 전통을 넘어 그 이전의 신화시대로, 마침내 원소에 대한 숭배와 태양에 대한 숭배로 이루어지는 그 야만으로 다가간다. 로빈슨이 절망했던 지옥이자, 로빈슨이 자신의 통제 하에 섬을 아내로 삼고 천국처럼 여기던 이 섬은 그렇게 천국도 지옥도 아닌 연옥과도 비슷한 어떤 시공이 되고, 방드르디와의 날들로 어떤 신화와 같은 것을 이룩한 로빈슨은 다음 세대의 소년에게 아마도 기꺼이 새로운 신화 이야기를 들려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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