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혐오”에 대해 남편과 이야기하다

사실 강남역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하루이틀 동안은 세이와 이 이야기를 하는 게 두려웠다.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피했다. 설령 의견이 다를지라도 세이는 내 의견을 경청할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인터넷에는 여자가 여성혐오 및 일반화로 인해 거의 백주대낮이나 다름없는 강남역 수노래방 건물에서 그렇게 살해당했는데도 “남자를 혐오하지 마세요, 일반화하지 마세요”같은 소리나 하는 답답한 작자들이 너무나 많았고, 만약 내 집에서 그런 소리를 들었다간 내가 애를 안고 나가든가 세이를 내쫓아버리든가 둘중 하나로 갈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높은 확률로 세이를 내쫓아 버렸겠지…… 이 집은 내 명의로 계약했고 대출도 내가 받았다는 점을 들어서.) 사실 그 살인사건 자체보다, 인터넷의 수많은 남초 사이트들, 더러는 내가 가서 놀기도 했던 그 많은 사이트들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이 더 두려웠고, 끔찍했으며, 그것 때문에 아팠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한 사흘, 글 한 자 쓸 수가 없었다. 가만 보니까 트위터에서 아는 작가들의 상태를 보아 하니 나만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저런 자들이 저렇게 드글거리는데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게 기적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저렇게 멍청한 새끼들이 드글거리는 세상에 자식을 낳아서 미안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튼 사나흘을, 앓았다.

어젯밤에야 세이와 이 이야기를 할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 물론 그 며칠동안 세이도 많은 것을 보고 읽고 생각을 했던 모양이었고, 내게 궁금한 게 많다며 질문을 했다. 세이는 남녀차별이 심각하고, 이번 살인사건은 그녀가 여자라서 당한 사건이라는 것에도 동감하며, 여자라서 범죄의 피해자가 되기 쉽고, 생각보다 정말 많은 성희롱과 성추행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에도 동감했다. 남자가 개인으로서 여자를 좋아하더라도(어머니나 아내, 여자친구, 여동생) 사회 전반적으로는 여혐에 해당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까지 이해했다. 다만 왜 그것이 여성 “혐오”라고 불리는지, 그 여성 혐오에 왜 여성 숭배도 들어가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래 뭐 이정도만 해도 대한민국 10%에는 들 것 같았다. 한편으로, 공돌공돌한 책과 소설책은 열심히 읽지만 인문의 인자도 가까이하지 않는 세이가, 이런 문제가 있을 때는 열심히 머리를 굴리다가 내게 물어볼 만큼은 뭔가를 알고자 하는 사람이라는 게 정말 다행스러웠다.

일단 여성혐오라는 단어는 미소지니의 번역어인데, 살면서 수학이나 컴퓨터 용어 중에 딱 맞지 않는 단어들이 있다는 것 알지 않느냐고 물었다. (극단적으로는 “큐”를 대롱, “패킷”을 보쌈이라고 번역하신 양반도 계셨지……) 일단은 여자를 동등한 인간으로 보지 않고 2등시민, 내지는 객체로 보는 현상, 타자화하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혐오”보다는 “멸시”로 번역하는 게 나을 것도 같지만 일단 그렇게 번역되어 들어온 단어이므로(……) 우리 집에서는 편의상 미소지니라고 부르겠다고 했다. 2등시민이나 타자화라고 말하자 거의 90%는 알아들었다.

내가 교복을 입을 무렵부터 계속 겪었던 각종 성희롱과 위협에 대해 설명해 줬다. 머리를 스포츠로 깎고, 우리 회사 아저씨들 표현에 의하면 “동네 남자중학생 룩”으로 입고 다닌 것도 매번 그런 일로 “경찰 불러 씨발놈아!!!!”를 하기가 귀찮아서였다는 이야기도 했고, 더는 그런 것으로 피해 다닐 수 없었던, 임신기간 중에 등산복 입고 돌아다니는 영감님들이 등산용 스틱으로 배를 겨냥하며 위협하던 이야기 같은 것도 했다. 우리가 중학생 무렵 나왔던 드라마 “M” 에 대해 이야기하며, 우리 세대와 그 다음 십여년간 일어난 낙태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특히 그 드라마가 나올 당시 남학교 애들은 그냥 아 공포드라마다 심은하가 눈에서 빔을 쏘는구나 했지만 여학교 애들은, “사실은 우리 엄마도 낙태를 했어”라는 이야기들을 굉장히 많이 했다는 것, 우리가 운이 좋아서 겨우 태어났다는 이야기들을 했다고도 말해줬다. 세이는 멀쩡한 지성을 가진 남자였으므로 여기까지는 무척 잘 이해했고, 분노했으며, 자기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해 했다.

문제는 “여성숭배” 다시 말해서 여신 취급이나 뮤즈 취급이 왜 여성혐오에 들어가는지, 혹은 그게 왜 멸시가 되는지에 대해서는 잘 이해를 못했다. 정확히 말해서 특정인을 여신취급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넌 왜 저렇게 못해”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은 알겠는데, 뮤즈로 여기며 영감을 얻는 것은 왜 문제인가(샤이니 종현의 예)에 대해 궁금해 하길래 좀 세게 말했다.

“그게 말이야, 조금 극단적으로 확장하면 뮤즈로 취급해서 영감의 원천으로 삼는 거나, 딸감으로 취급해서 마스터베이션의 원천으로 삼는거나 본질적으로는 같아.”
“헐.”
“물론,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을 망상하면서 할 수도 있지. 그게 잘못은 아닌데 그 연예인 앞에서 님이 제 딸감이라고 말하면 되나요 안되나요.”
“…….그런 미친놈은 두부에 코를 박고 죽어야죠!”
“응, 그래서 그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자마자 바로 알아들은 종현은 깨인 남자였던 거죠. 난 그 일 이후로 샤이니를 찾아 듣게 되었음.”

뭐 그렇게 설명하고 잘 넘어갔다.

여기까지 이야기가 나오고 나니, 세이는 결국은 여성혐오가 없어지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돈 없는 남자에게 유리하다는 사실까지 이해했다. 사실 우리가 결혼할 무렵 세이는 정말 옷과 컴퓨터와 쓰던 밥숟가락밖에 없던 상태였고 내가 함께 살 집과 최소한의 결혼비용을 마련해서 같이 살았다. 만약 더 평등한 사회가 된다면 장차 꼬꼬마가 옛날의 세이처럼 돈은 없지만 마음 반듯하고 똑똑한 녀석과 같이 살겠다고 해도 뭐 잘난 우리 딸이 먹여살리면 되죠 뭐 하고 넘어갈 수 있겠지만, 여성혐오가 더 심해지고 여자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 더 심해진다면, 막말로 사랑만으로는 같이 못 산다는 점에 대해 세이는 정확히 짚었다. 즉, 지금 여혐하는 남자애들은 스스로 자신의 혼삿길을 막고 있다는 점까지 세이가 잘 이해해 줘서 고마웠다.

세이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세이가 나나 꼬꼬마를 늘 옆에서 지켜줄 수는 없으며, 설령 그게 가능하다 한들 세이의 피지컬로는 맞아죽지나 않으면 다행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네 상사가 여혐 발언을 하는 것까지 말리라고는 안 할거예요. 너도 직장인이고 그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 근데 너랑 동급이거나 네 아랫사람이 그럴 때는 말렸으면 좋겠음. ㅇㅇ”
“ok. ㅇㅇ”
“인터넷에서도.”
“ㅇㅇ”

세이가 순순히 다 알아들어줘서 무척 고맙고, 이걸 내게 물어 볼 생각을 한 것만으로도 꽤 괜찮은 남자와 살고 있는 것 같아서 안심하게 되었다. 원래대로라면, 우리집에 페미니즘 관련된 책을 저만큼 사다놓았는데 왜 책을 읽지 않는가 으르렁 으르렁 했어야 했는지도 모르지만, 인터넷에서 본 수많은 남자들을 보고 났더니 저 정도만 되어도 머리 뒤에 희미하게 광배가 비치는 느낌이 든다.

하아.

모르면 물어보기라도 했으면.

모르는데 배울 생각이 없는 놈들이 제일 나빠.

자생한방 똑똑한 차

20160521자생한방똑똑한차

  • 제품 권장 레시피 : 1티백+90℃ 120~150mL+3분
  • 실제 음용 레시피 : 2티백+물 360mL+5분

건강, 진피, 맥아, 백출, 인삼, 창출 등이 들어 있어 머리를 맑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홍보하는 차. 실제로는 롯데마트에서 유통기한 임박으로 자생한방차 티백 10개들이 한 팩당 800원에 잔뜩 나와 있어서 몇 팩을 사왔다. 쌉쌀하고 희미하게 지린내 같은 약초 냄새가 나는 것을 보리(맥아)가 잡아주는 듯한 느낌으로, 연하게 타서 마시면 인삼탕 같은 느낌이 난다. (인삼탕에도 건강과 창출이 들어가다보니 더 그럴지도)

약리작용이 있는 차라고 하더라도 실제로 뭔가 반응이 나타나려면 대단히 진하게, 많은 양을 먹어야 하니 실제 효과를 기대하기보다는 공부에 도움이 될 거라는 기대감으로 마실 수 있을 듯한 차. 할인해서 다양하게 구입해 왔지만, 굳이 이 차를 추가로 구입할 것 같진 않다.

곡성 : 산신신앙 대 적그리스도의 흥미진진 맥거핀 서비스

곡성 보고왔다. 전에 말했던 것 같은데, 사실 나는 요즘 같은 영화를 두 번 볼 수가 없다. 지루해서 못 보는 것도 아니고 덕심이 부족해 못 보는 것도 아니며, 그저 시간이 없을 뿐이다. 그나마 요즘은, 개봉관에 걸려 있는 동안 볼 수나 있으면 다행이다. 육아가 이정도일 줄은 몰랐다. 여튼 일기일회, 집중해서 보고 왔다. 놓친 게 많을 것 같아 좀 걱정이지만.

그건 그렇고, 곡성은 요즘 화제작이다. 한국영화의 새로운 희망이라는 느낌의 리뷰들이 쏟아지고 있는데, 일단 가급적 리뷰는 보이는 건 보고 일부러 찾아서 보진 않은 상태로 영화를 보러 갔다. 기독교적이라는 말이 많이 있고, 일본인이 적그리스도면 무명은 뭐냐, 뭐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귀신이라는 이야기도 있었고, 적그리스도에 대적하니까 그에 걸맞는 존재라는 이야기도 있고. 근데 그렇다면, 처음 사람 죽은 집에 돼지가 있었는데 그 돼지들이 발광하지 않았다. 기독교였으면 마귀를 돼지 않으로 쫓는 시퀀스가 어떤 식으로든 들어갔겠지. 일단 단순하게 기독교 이야기는 아니라는 전제를 깔고 영화가 시작된다.

영화는 질문편과 해답편처럼, “덫을 놓는” 장면과 “그로 인한 결과”로 나뉘어진다. 처음에 일본인이 낚싯바늘에 미끼를 꿴 장면부터, 일본인의 시체가 산에서 굴러떨어지는 장면까지가 “덫을 놓는”장면에 속한다. 일본인과 박수무당 일광은 처음부터 한패로, 일광이 옷을 갈아입는 장면에 나온 훈도시로 노골적으로 표현된다. 일본인의 밀교 의식 장면에는 뿔이 달린 것들이 나오고, 일광의 굿판에도 뿔이 달린 소 머리를 놓는다. 종구가 일본인의 검둥개를 죽인 뒤, 종구의 집 앞에 걸려 있던 것은 내장이 튀어나온 흑염소였다. 이들은 모두 악마를 상징한다. 여튼 다 좋은데 황정민의 엉덩이 구경을 할 줄은 몰랐다. (……) 여튼 일본인이 태웠다고 주장한 사진들은 마지막에 일광이 갖고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일본인의 정체는 교수라는 말도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의외로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그의 제단에는 목이 잘린 듯한 불상과 함께, 뒤쪽에 사진이 붙어 있는데, 이는 밀교 전승자로 생각된다. 하다못해 레이키만 해도 전승자를 통해서 능력을 내려받는 식으로 배우는데, 밀교라든가 악마숭배라든가, 전승자를 통해서 배웠겠지. 어딘가의 리뷰에서는 그의 제단을 둘러싼 것을 예수의 면류관이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까마귀의 둥지로 보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까마귀는 일본 신화에서 진무천황이 가야 할 길에 난폭한 토착신이 많으니 까마귀를 데리고 가라, 그런 내용 본 것 같은데, 아마 그 용도일 것이다. 즉 일본인은 외지에서 넘어와 토착신과 싸워 이 땅을 차지하려는 악한 존재로, 적그리스도일 수도 있고 밀교 쪽의 악일 수도 있다. 여튼 기독교적 모티프는 다 갖다 써서 만들어 놓은 악한 존재인데, 베이스가 밀교라는 게 재미있다.

효진의 그림이나, 일본인에게 강간당했던 여자가 괴질을 앓고 미쳤던 것으로 볼 때 그 괴질은 섹스를 통해 옮는 듯. 작중에서 괴질을 앓은 사람들 간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은데 한번만 봐서는 다 체크가 안 된다. 일광의 굿이 살을 날린 대상은 효진. 일광의 굿 중간에 장승에 못을 박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건 일본인을 공격하는 게 아니라 무명을 공격하는 것으로 보이고, 결계를 부수는 행위에 가깝다. 결계라고 말하니까 생각났는데 가택신을 공격하는 장면들이 나온 것이 흥미롭다. 문가에 내장이 튀어나온 죽은 흑염소를 걸어놓은 것, 장독에 까마귀를 집어넣은 것, 무당과 시체들을 우물속에 던져넣은 것, 효진이 냉장고를 엉망으로 만들고 마지막에 보일러실에서 종구의 아내와 장모 시체가 발견되는 것, 다 가택신을 범하는 것이라 흥미롭다. 가택신의 결계로서 대문이나 장독을 깨고 나서야 일광이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고, 우물이나 냉장고(주방), 보일러실 등을 범하고 경우에 따라 화재를 내는 것으로 침략을 마무리하는 느낌이다. 특히 효진이 냉장고를 엉망으로 만든 것, 종구의 아내와 장모가 보일러실에서 죽은 것은 조왕신의 죽음으로 연결되어서 느낌이 묘하다.

여튼 일광(황정민)의 굿 장면은 일품. 살을 날리는, 소위 방자하는 굿이라서 그동안 자료로 본 굿과는 형태가 다르지만, 상당히 힘이 느껴지는 장면이자, 연구를 많이 한 장면. 굿에 쓰인 제물들과, 효진의 방에 차려놓은 제삿상에도 다 뿔 달린 머리들이 있다. 이 제물들은 악마숭배와 연관이 있다.

무명은 성모는 성모인데 “우리들의 성모님”에 나오는 그 성모. 즉 마리아가 아니라, 산신인 여신에 가깝다. 기독교적 존재도 아니고 단순한 “선”도 아니라서, 선악을 가르는 존재라기보다는 외부의 악으로부터 자기 구역이 침범당하는 것을 막으려 한 것 같다. 무명이 말하는 “할머니”는 구삼승할망(죽은/죽어가는 아이를 돌보는 삼신할미)일지도.

선을 넘는 것에 대해 몇 장면이 나온다. 종구는 처음에는 무명을 따라서 폴리스 라인을 넘어 들어갔다가 일본인과 마주쳤다. (그리고 일본인을 “의심”한다) 그는 일본인의 집에 쳐들어가 잠긴 문을 부수고, 그를 위협하며, 덤벼드는 개를 죽인다. 그는 자기 손으로 피를 뒤집어 썼고 이것이 첫번째 부정이자, 일종의 각인. 다음은 일본인의 집에 쳐들어가서 좀비(라기보다는 밀교 주술로 살아난듯한)와 싸우고 피가 입에 들어갔으며, 마지막으로 일본인을 죽이려 했고, 자기 손으로 죽이지는 않았지만 일본인의 시체를 발견하고는 벼랑 아래로 시체를 던진다. 이것으로 덫에 완전히 걸려들었다. 그는 일본인과 관련하여 세 번 피를 만졌고, 그것으로 부정을 타는 것이 완성되었다.

닭이 세 번 우는 건 기독교에서 오긴 했는데, 만약에 닭이 울기 전에 베드로가 배신을 안 했으면 베드로는 죽었겠죠. 그럼 어차피 세 번 울도록 기다려도 일가족은 다 죽었을 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번 울 때 까지 기다리라고 한 건 영혼의 문제에 가깝다. 배신 안 한 버전의 베드로라면 함께 죽는 대신 완전히 영혼의 구원을 받았겠지. 마지막에 일광이 사진 찍으러 온 것, 그동안 나온 사진들이 “영혼을 가두는 것”에 해당된다면, 무명은 일가족이 죽더라도 일광이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여 영혼을 구하려고 한 것으로 본다.

종구가 돌아갔을 때 아내는 곧 절명했고, 종구는 일광이 들어와도 손쓰지 못한 채 사진 찍힌 것으로 봐서, 종구는 살아남지도 구원받지도 못할 듯. 그렇게 치면 무명은 일가의 영혼을 구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종구는 “살아남은”것이 아니라, “절망하며 죽어갔”으며, 이는 그가 처음부터 던져진 떡밥마다 팔랑거리고 낚이며, 명확한 증거 없이 일본인을 의심하고 살해하려 한 “죄”의 대가를 치른 것으로 보인다. 설령 그가 악이라 할 지라도, 그는 미숙한 인간으로 “경찰”이면서도 증거없이 “사적 복수”를 하려 했다. 그에 대한 결과물일지도.

한번 더 보면 재미있는 게 꽤 보일 것 같은데. 여튼 맥거핀을 진짜 열심히 던져서 (아니 그 밀교좀비라든가 말이져) 기분나쁘고 흥미롭게 만든 것은 사실. 한국 영화의 새로운 희망 급은 아님. 그래도 최근 몇년간 나온 것 중에서는 수작이었다.

20년, 두 살인사건, 나아진 게 없는 세상

20년 전 이태원에서 한 청년이, 버거킹 화장실에서 미군 군속 가족에게 살해당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때 언론은 “이태원 살인사건”이라고 했고 “미군이 살인을 했다”고 했죠. 한국 학생이 살해당했다고 한 게 아니라.

20년 전에도, 가해자를 부각했단 말입니다.

그 미군속의 아들이 무슨 꿈을 꾸고 있었는지 어떻게 억울했는지, 그런 이야기를 하는 언론은 물론 없었습니다. 버거킹 화장실에서 살해당한 그 청년이 어떤 학생이고 어떤 아들이었는지, 어떤 꿈을 꾸었는지 얼마나 억울한지 말했죠. 기자님들은 밥값을 하세요. 어떻게 20년전보다 퇴보를 하고도 밥이 넘어가세요. 범죄에 대해 가해자를 부각하고 피해자에게 온정적인 태도를 취해야지, 어떻게 피해자를 부각해서 XX녀, 하면서 가해자에게 온정적으로 기사를 씁니까.

확인차 검색해보니, 그때 버거킹에서 살해당한 청년도 스물 세 살이었습니다. 이번에 강남역 근처 건물 화장실에서 살해당한 여성도 같은 나이죠. 그런데 그녀가 얼마나 억울한지, 어떤 꿈을 꾸었는지 말하는 언론이 하나도 안 보이네요. 보이는건 가해자가 목사를 꿈꾸던 신학교 중퇴자라는 이야기밖에 없습니다. 여자들에게 무시당해서 억울한 마음에 범행을 저질렀다는 말밖에 없습니다.

아니, 그런거 쓰면서 진짜 밥이 넘어가세요? 20년전보다는 좀 발전해야 하지 않습니까?

젊은 나이에 살해당한 남자가 억울하고 안타까운 만큼, 같은 나이에 살해당한 여자에게도 같은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가해자가 외국인일 때와 내국인 남자일 때는 태도를 달리해도 되는 건가요? 그럴 리 없습니다.

2016년 5월 17일 새벽, 외진 곳도 아닌 강남 한복판, 강남 수노래방 건물에서, 듬직한 남자친구와 함께 있던 여자가, 불과 몇 분 화장실에 간 사이에 살해당했습니다. 살인자는 “여자들에게 자주 무시를 당해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말하고 있고, 언론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 살인자의 핑계를 대서특필하고 있네요. 죽은, 스물 세 살이고, 아마도 학교에 다니고 있거나 취업을 앞두고 있었을 것이며, 사랑하는 사람도 있던, 한 사람의 찬란한 미래가 그대로 사라져버린 것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 시간에 집에 있어서, 친구네 집에 있어서, 회사나 도서관에 있어서, 혹은 운이 좋아서,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언제 누구의 차례가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분노와 슬픔 앞에서 밥값 못하는 기사들, 그저 자극적으로 쓰는 것에 급급한 기사들을 보고 있으면 이 나라에 미래라는 게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여자가 늦게 다녀서”같은 소리를 하는 놈들을 보면, 한국인이 과연 더 번식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그래도 살아남았으니까, 조금은 더 세상이 나아지기를 바라면서 글을 씁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웹툰 전시회 “이.십.대-20대의 10분 대만족”에 다녀왔습니다

20160514웹툰전시회이십대

부천시청 청사 1층 로비에서 5월 14일 하루동안 진행된 웹툰 전시회 “이.십.대-20대의 10분 대만족” 전시회에 다녀왔습니다. 지난달쯤 대학생 문화기획단이라는 곳에서 20대의 일상을 다루는 웹툰들을 주제로 무료전시회를 할 계획이라고 연락이 왔고요. 스토리작가인 제가 결정할 문제는 아니라, 이수현 쌤에게 토스해 놓은 상태였어요.

사실 “내 웹툰이 어디 전시된다”거나 “홍보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점에 크게 기대를 하고 가진 않았습니다. 대학생 기획단들이 하는 전시란, 대개 지하철 통로에서 열리는 사진전의 퀄리티를 벗어나기 힘든 법이고요. 들일 수 있는 비용이나 시간 문제도 있고, 번듯하고 폼나게 뭔가가 되길 기대할만한 상황은 아닙니다. 사실은 코미코/재담미디어를 넣어달라고는 했지만 저렇게 크게 들어갈 줄은 몰랐고(웃음) 저 사이즈로 들어갈 것 같으면 위에 PermIT의 타이틀 로고도 같이 들어가는 게 맞았겠죠. 학생들이 하는 행사 답다고 생각했지만, 당혹스럽거나 난감하진 않았어요. 정성스럽게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구획을 나누어 웹툰들을, 20대의 생활 분야별로 소개했고, 방문객들을 위해서 무료전시지만 간단한 브로셔와 티켓(아마도 티켓 수집하는 사람들을 위해 만든 것 같았어요)도 마련해 놓았고요. 또 저는 참여하진 않았지만 뭔가 구석에서 이벤트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오늘 전시한 웹툰의 작가들이 방문했을 때는 따라와서 짧게 전시에 대해 설명해 주시고 사진도 따로 한장씩 찍으시더라고요.

여튼 지방에 계신 이수현 쌤에게 인증샷을 보내드리기 위해 제가 잠깐 들러 사진도 찍고 둘러보고 왔습니다. 생각해보니 제가 쓴 이야기가 만화로서 어디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언젠가는 좀 더 큰 곳에 걸려 보기를 기대하면서 돌아왔습니다.

신님x나님x자기님?! – 사카노 케이코

신님X나님X자기님 110점
사카노 케이코 지음/대원씨아이(만화)

거래처에서 날아온 소포를 뜯자마자 이 책의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아니, 정확히는 띠지가.

“왕밋밋 초딩 몸매 여고딩, 로리콤 뵨태 신과 키스♡하고 쭉쭉빵빵 급성장?!”

……난데없이 이런 띠지가 달린 책을 받아들게 된 이 사람의 표정을 원고지 400자 내외로 묘사하시오.

띠지가 너무 충격적이어서 뒤집어 보았다.

“살짝 에로틱 / 꽃미남신 / 심쿵유발 / 츤데레녀 / 핵설렘각”

아, 그렇구나. 이 만화는 로리콤 변태 신이 유아체형 여고생을 자기 취향에 맞는 폭유로 변신시켜 하렘에 집어넣는 이야기구나. 남성향인가보네.

하며 책을 뒤집는데 책등에 선명한 i 자 들어간 로고. 이슈 코믹스였다.

대체 어디가!!!!!!!!!! OTL;;;;;;;;;

언제는 공모전에다가 “하늘빛 사랑을 꿈꾸는 소녀들을 위한 블라블라 어쩌고 저쩌고”해서 공모전에 원고를 넣는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더니, 이건 뭐야!!!!!!!!

근데 이 충격적인 띠지와는 상관없이, 이야기 자체는 제법 재미있었다. 강력한 힘을 지녔지만 이 유아체형 여고생, 정확히는 일곱 살 때 자기에게 청혼했던 이 여주를 무척 귀여워하고 좋아하는, 강아지같은 신이 수시로 여주에게 멍석말이를 당하면서도 그녀를 구해주는 패턴은 뻔하지만 이런 장르의 오프닝으로 나쁘지 않은 전개였고, 이 패턴이 3번 반복된 뒤, 4화에서는 클리프행어 스러운 전개로 2권을 기대하게 만드는 것도 좋았다. 무엇보다도, 등장인물들 중에 짜증나는 민폐형 인물이 없이 다들 귀엽고 대체로 무해하다는 것이 좋았다. 중간에 나오는 떡토끼가 무척 귀여웠고.

……이렇게 리뷰를 쓰려고 하는데, 세이가 옆에서 읽으면서 자기 취향이라고 좋아하는 것을 보았다.

이럴 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지 모르겠지만 좋아하는 것 같으니 2권 나오면 사줘야겠다.

함치르르 – 전오랑, 코미코

http://comico.toast.com/titles/2367

작년 코미코 1주년 행사 때, 이 작품의 이름을 처음 들어보았다. 글로벌 루키 공모전 장려상 당선작이었고, 지금은 아직 8화인가 까지밖에 안 나왔지만 주의해서 보고 있는 작품 중 하나다.

점수 맞춰 대학에 왔지만 그곳에서 자신의 적성을 발견하고 나아갈 길을 찾는 대학 성장물은, 웹툰 시장에서 꽤 흔한 소재다. 당장 내가 쓰고 있는 펌잇만 해도 평범한 모범생이던 이진수가 친구를 잘못 만나 공과대학에 가고, 해킹 동아리에 들어가면서 생기는 일들을 다루고 있으니까. 하지만 함치르르는 일단 소재 면에서 먹고 들어가는 부분이 크다. 특히 요즘처럼, 현대화 한 한복들이 조용히 인기를 모으는 시대에는 특히 그렇다.

결혼할 때 웨딩드레스 대신 한복드레스를 입으면서 한복의 파티복으로서의 가능성에 대해 새삼 깨달은 적이 있었다. 파스텔톤 돌잔치 드레스 말고, 꽤 강렬한 배색을 쓴 한복드레스여서 특히 그랬다. 서양복식에서는 쉽게 쓰기 힘든 녹의홍상의 배색을 살린 한복드레스였는데, 그런 시도들이 계속 이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그 업체의, 은회색 훈민정음 드레스가 무척 귀여웠다.) 몇 년이 지난 지금, 그 회사는 전주의 시장 골목이 아니라 전주 역 앞에 사무실을 열고, 실물로 보면 더 근사한 두루마기형 코트와 철릭 원피스를 만들어내고 있다. 언젠가는 그런 현대화한 한복에 대한 이야기도 써 보면 재미있겠지 하고 생각하던 딱 그 무렵에, 이런 만화가 글로벌 루키 공모전에 당선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무척 기대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이 만화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성적 맞춰 학교에 갔지만 과에 대한 이해는 부족한 주인공이, 공부해서 거기까지 갈 수 있었던 그 투지로 남들에게 밀리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하기로 결심한” 단계까지밖에 오지 않았으므로 뭔가 구체적인 이야기를 할 만한 상황은 아니다. 사실 여기까지는 흔한 전개이기도 하고. 협조자와 경쟁자들이 보이고, 츤데레 남주 포지션의 남학생도 초반부터 나왔다. 이 흔한 전개를, 식상하게 만들어낸 “그저 웹툰 세계에 백만 스물 한 가지는 있을 법 한 대학교 새내기 이야기”가 아니라, 좋은 소재를 살려서 좋은 이야기를 이끌어 낼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코미코 공모전에 통과한 만큼, 아마도 그만큼의 저력을 갖고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다만 분명 오프닝에서 본 공다래는 세탁 및 옷수선집 손녀로 태어나 심지어는 고3 수험공부를 가게에서 했을 정도로 투지가 넘치는 아이였는데 어째서 (아무리 한복집 갔다가 담이랑 만나서 넘어져서 여기저기 깨졌다고 해도) 바느질 연습도 안 해갔는가. 이녀석의 투지란 이론공부에만 치중한 것이었는가 뭐 그런 생각이 들긴 들지만. 캐릭터의 일관성이라는 것은 그렇게 간단히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좋은 소재를 살리는 좋은 만화가 되면 좋겠다. 이 소재에 대학 배경 성장물이라면 멀티유즈를 하기에도 좋을 것 같은데. 제목 그대로 밝고 반지르르 빛나는 만화가 되면 좋겠다.

“소녀, 순정을 그리다” 전시회 다녀왔습니다.

20160504소녀순정을그리다

집 근처의 부천만화박물관에서 “소녀, 순정을 그리다”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어제, 개막날 다녀왔어요.

3층의 1전시관에서는 황미나, 김진, 원수연, 신일숙, 김혜린, 이미라, 이은혜, 강경옥, 한승원 선생님 등등 80~90년대를 풍미하신 만화가 선생님들의 작품 원화들과 옛 단행본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만화책에서 보던 것보다 크고 선명하며 섬세한, 정확히 말하면 그때 그시절 인쇄 기술로는 제대로 인쇄가 되지 않거나 뭉개졌던 그 그림들의 원본을 보고 있다보면 “포토샵도 없던 시대에 저 머리카락을 어떻게 그린거야 히에에에엑” 소리가 입에서 절로 나옵니다. 이런 그림을 당시의 인쇄술로 인쇄하기에도 아까웠지만 “스마트폰으로 보기엔 더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앞으로는 더욱 스마트폰으로 가게 되겠지만, 그건 압니다만.

1전시관 안에 가벽을 세워 공간을 둘로 나눴으며, 바깥쪽 공간은 티파니 블루에 가까운 민트색, 안쪽 공간은 핫핑크로 채워놓고, 안쪽 공간 벽에는 복고풍 폰트로 명대사를 출력해 놓아 사진 찍기 좋게 만들어 놓았고요. 출구 쪽에는 당시의 소녀, 를 상징하는 듯한, 책상과 카세트 테이프, 하다 만 가사 숙제같은 바느질 거리와 성문기초영어 등이 놓여 있습니다. 아마 그때 그 시절 소녀들은 이런 책상에 앉아서 만화책을 봤을 것이라는 이야기일까요.

1층의 2전시관에는 1전시관에 이어, 김숙, 이해경, 여호경 선생님 등의 원화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2전시관은 내부의 반 층 계단으로 층을 두어 공간을 나눠 놓았는데, 계단 아래에는 여만협 회원 선생님들이 80~90 순정만화 작품들을 오마주한 일러스트레이션, 다시 말해 굉장한 고퀄 팬아트들이 걸려 있습니다. 특히 여호경 선생님의 “아르미안의 네 딸들” 일러스트와 강미정 선생님의 “프린세스” 스카데이와 라라 일러스트가 무척 훌륭했습니다.

아래쪽 벽을 보고 다시 계단으로 올려오려고 보면, 계단 중간중간에 태블릿을 설치해 놓았습니다. 2000년대 로맨스 웹툰들을 볼 수 있게 해 놓았어요. 직접 터치하는 식이 아니라 자동으로 돌아가는 방식이라 읽는 속도 조절은 안 됩니다. 예쁘고 아기자기하며 좋은 전시였어요.

물론 개인적으로는 큐레이션에 불만이 좀 있습니다.

1980년대~1995년까지의 만화들과 2005~2015년의 로맨스 웹툰을 함께 놓고 다루며 형태는 바뀌었지만 순정만화의 세계는 계속된다는 점을 보여주는 기획이라는 점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1995~2005년 사이에 순정만화에 뭐가 없었느냐 하면, 그렇지 않거든요. 지금은 없지만 밍크, 케이크, 주띠, 비주, 오후, 허브, 지금도 있는 이슈, 파티, 그리고 성인지였던 화이트와 나인. 다 그 시기에 “창간한” 잡지들이었고, 정서상으로는 두 시댇 사이의 가교라고 생각하는데 그 부분을 통째로 들어낸 듯한 느낌이 자꾸 마음에 걸려서. 이 시대의 순정만화는 그 전 시대와는 또 다른 모습과 양상과 소재를 보여주었고, 이 시기에 데뷔하신 걸출한 작가 선생님들이 한두분이 아니신데! 마치 로맨스 웹툰을 “80~90년대 순정만화”의 적자로 삼기 위해 이 시대를 서자 취급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찜찜했어요. 아니기를 바랍니다.

도록이 무척 좋습니다. 당연히 80~90년대 올스타전에 가까운 전시회니까요. 종이 질도 두껍고 인쇄도 선명합니다. 다만 중간에 두 페이지 정도, 그림 모으기를 안 했거나 잘못 했는지 해상도가 굉장히 떨어지는 페이지가 있고요. ㅠㅠ 도록 맨 뒤에 왜 있는건지 모르겠지만 “컬러링 북으로 쓸 수 있는” 선화가 10장 정도 붙어 있어요. 아니, 뭐 선화를 감상하는 것은 좋습니다만 이걸 무슨 수로 칠하라는 것이냐고 음.

여튼, 80~90년대 순정만화 좋아하시는 분들은 꼭 가보실 만한 전시회이긴 합니다. 95~05가 빠진 거야 뭐 제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고 제가 그 시절에 한참 만화책을 사 모았던 세대라 신경이 쓰이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요. 당시를 추억할만한 작품들을 잘 엄선해서, 그 중에서도 특히 아름답고 독자들의 기억에 남을 만한 페이지들로 원화를 전시해 놓은 귀중한 전시입니다. 1층 로비에서는 장애인 만화가 기획전시회인 “겨드랑이가 가렵다”도 전시중이고요. 그러고 보니 이해경 선생님은 이번에 두 전시에 동시에 참여하셨네요.

이런 상사 때문에 곤란하다면 – 사쿠라노 미카, 대원씨아이

이런 상사 때문에 곤란하다면 14점
사쿠라노 미카 지음/대원씨아이(만화)

다리 페티시가 있는 직장상사 사에키와, “내가 위안이 된대…. 다리 뿐이라지만 내 일부분을 그렇게 사랑해 주다니.” 하는, 자존감이 없다 못해 바보에 가까운 OL 여주인공 아키노가 나오는 만화. 하지만 이런 류의 만화가 흔히 그렇듯 여주인공은 치유계이자 남주의 유일한 안식처이고, 일만 잘 하는 남주가 주변을 배려하지 못하는 것을 대신해서 “엄마처럼” 주변을 돌보고 다닌다. 남주보다 똑똑하고 잘난 그의 전 여친은 악역은 아니지만 여주인공을 질투한다. 남주인공의 라이벌인 카시야에는 남주인공을 이기기 위해 아키노를 빼앗으려고 한다.

전형적이다 못해 지루할 정도. 고압적인 상사와 천연계 부하가 만나 뭔가 억지스런 관계를 두 화정도 유지하다가 상사의 라이벌이 나와 천연계 부하를 빼앗으려 하고, 그 일이 잘 넘어가나 했더니 전 여친이 등장, 하는 데 까지 1권 안에 끝나는 만화만 골라서 줄을 세워도 홋카이도 정도는 빙 둘러쌀 수 있지 않을까. 클리셰도 좋지만 읽는 내 입장에서는 총체적 난국같은 만화. 하지만 신조 마유가 “바보도 따라할 수 있는 만화교실”에서 말했던, 독자들이 이입하기 쉬운 “밝고 건강”한 여주인공에 대해 생각해 볼 만한 점은 있었다.

작가와 젠더 감수성

모 작가님 서강대 강의 취소된 이야기를 보다가 문득 생각나 트위터에 “청강대 박인하 교수님 페북을 보니 청강대에서는 5월에 작가를 위한 젠더감수성 강연같은 것을 하는 모양임. 청강대가 학생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들을 가르치고 좋은 시도를 하고 있다”고 올렸다. 그 트윗이 지금 800RT가 넘어가고 있다. 변방의 트위터 계정인데다 창작쪽 이슈라서 모두가 공감하는 내용도 아닌데(섹드립이나 정치드립니라면 몰라도……) RT가 많이 되어서 흥미로웠다.

근데 정말로, 젠더감수성은”계집들이나 프로불편러들의 짜증”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무엇보다 지금은 한국 만화 중에도 여러 작품들이 외국으로 나가고 있는 시대인데, 한국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그런 것이 외국에서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는 것이고. 또 이번 일처럼 될 수도 있고. 점점 더, 한국 사회가 19세기 농경문화+유교문화권에 어설픈 현대문명의 스킨만 씌워놓은 형태가 아니라 겉보기와 알맹이가 함께 맞아들어가는 방향으로 발전해 나갈 수록, 작가들에게 젠더 감수성이나 인권 감수성은 곧 생존전략이 될 것이다. 그건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만 그리라”는 고리타분한 말이 아니다. “자기가 무엇을 쓰고 그리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건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의외로 정말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사니까.

다행히도 지금까지 내가 뵙거나 함께 일한 작가님들은 대개 동시대 사람들보다 인권에 대해 잘 알고, 젠더 감수성도 뛰어난 분들이 많았다. 그건 인간을 2차원 모에캐릭터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서는 인간 전반을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여자가 자기 성격이나 백그라운드와 상관없이 단순히 소꿉친구와 누님, 츤데레 쿤데레 얀데레 썅년으로 나뉘고, 가슴 크기로만 세분화되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은 어째서 저렇게 생각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어떻게 될 것인지를, 타인의 작품 속 캐릭터들을 보고 떠올린 피상적인 종이인형들이 아니라, 인간을 충분히 알고 보고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 나는 그게 무척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유형화된 모에 캐릭터를 먼저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먼저 이해하고 생각하며 그동안 연구된 많은 잣대를 통해 이를 좀 더 깊이 알려고 노력하는 모든 과정이. 그런 점에서라도 청강대에서는 무척 좋은 일, 중요한 시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창작을 그냥 가르칠 수 있느냐? 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다. 문예창작과 대학원을 다니기 시작한 지금은 더욱 그렇다. 이게 정말로 “배우고 가르칠 수” 있는 일인가? 하지만 적어도 대학은, 교육기관은, 창작 자체가 아니더라도 학생들에게, 예비 작가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이 많다. 지금 이, 젠더감수성에 대한 것도 그렇다. 창작이 가르칠 수 있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청강대가 작가에게 필요한 것을 주려고 노력하는 학교라는 것은 잘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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