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로 카드로 본 랑야방 인물분석

이 글에는 랑야방에 대한 네타가 굉장히 많이 들어 있습니다.

랑야방 그림 합작 같은 것을 하실때 참고가 되어도 기쁘겠네요. 출처만 언급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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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꽂힌 중국드라마 랑야방을 보던 중, 몇몇 캐릭터의 인생과 타로 카드를 겹쳐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다들 아시는대로 타로 카드는 대체로 22장의 메이저 카드와 4원소 속성 10장, 그리고 원소별 코트카드 4장씩 해서 총 7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이야기의 주요 틀이 되는 몇몇 인물/가문은 이 4원소와 맞물려 이해하면 알아보기 쉽다.

사실 이 아이디어를 처음 떠올린 것은 12화였나. 언궐 국구님의 젊은 시절 이야기가 잠시 나올 때였다. 언궐 국구는 지금은 나랏일에도 아들에게도 관심이 없는 듯, 도가 수련에만 몰두하고 있지만, 젊었을 때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외교에 나선 젊은 문관이자, 황제의 총신이었다.

사실 이 드라마에서 노리고 매력적으로 만든 캐릭터들은 많다. 비밀을 간직한 채,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을 다해 정왕을 태자로 만들고 역모죄를 쓴 가문의 명예를 회복하려 하는 고결한 주인공인 매장소/임수도 그렇고, 고직하고 일관되게 정의와 정도를 향해 걸어가는 정왕도 매력적이다. 임수의 옛 약혼녀의자 투희 속성을 지니고 있는, 러브라인 뿐 아니라 중요한 부분에서 임수와 정왕을 위한 키 역할을 하는 예황군주도, 비류나 몽 통령, 악역이지만 매력적인 예왕, 그리고 모두가 매장소 안의 임수를 안타까워할때 홀로 매장소 자체를 바라보며 그를 아끼는 린신 각주까지.

하지만 내 취향은 저 언궐 국구님이었다. 두뇌파 미중년은 원래 장르 불문 소중한 것인데다, 현실계와는 달리 덕질계에서는 짝을 잃은 남자, 홀아비 속성도 좋아한다. 아들에게 매정하게 구는데 사실은 아들을 목숨보다 사랑하는 아버지도 좋아한다. 얼마나 이런 속성을 좋아하냐 하면 어릴때 쓰던 소설에서 주인공의 아버지가 이런 속성의 총집편으로 나오는 바람에 주인공의 매력이 반감되어 버리기까지 했었다. 여튼, 그렇다 보니 국구님은 등장 분량은 적어도 내 덕질 포인트가 되어버렸다.

언궐 국구+예진 = 완드

이 국구님의 젊은 시절 장면은, 광야에서 그가 복슬복슬한 털 세 개가 달린 지팡이를 짚고 적진을 굽어보는 모습으로 한 컷 지나간다. 이 장면을 보고 완드 3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완드 3은 최초의 성공을 의미하며, 국구님은 3완드로 자신의 지혜를 증명하고 성공하고 나라를 구했다. 또한 5완드(경쟁)를 통해 자신의 군주를 황제로 만드는 데도 성공했다. 만약 그가 4완드, 결혼을 통해 행복해졌다면 그의 인생은 만사가 잘 풀렸으리라.

하지만 그는 6완드와 같은 영광은 얻었지만, 7완드, 내분을 겪는다. 정통성이 부족했던 황제는 자신의 총신들은 물론 친아들까지도 경계했으며, 그로 인해 8완드와 같이 신속하게 맏아들과 임씨 가문, 적염군을 역모로 몰아버린다. 지금의 국구님은 9완드와 같이, 세상을 향해 담장을 치고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10완드와 같은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이 남아 있었다. 매장소가 말리지 않았다면 그는 그로 인해 새로운 파국을 낳았을 것이다.

매장소를 만난 이후로 국구님은 킹완드가 되어 자리를 잡고, 분량은 적지만 이야기의 흐름을 이끌어나가게 된다. 완드는 4대 원소 중 유일하게, 그 자체로 생명과 강한 의지를 품고 있다. 그에게는 이야기 전반에서 제대로 챙기지 못했던 후계자 예진이 있으며, 페이지 완드로 생명력과 호기심이 강하던 예진은 국구님이 9-10완드에서 킹완드로 업그레이드될 무렵, 아버지와 흉금을 터놓고 비밀을 공유하며 나이트 완드로 업그레이드된다. 이 강력한 나이트와 킹이 진가를 발휘하는 장면은 역시 예왕의 반역 시퀀스다. 예진은 기꺼이 검을 들고 맞서 싸우며, 국구님도 두려워하는 황제와 신하들 앞에서 몸소 검을 들며, 황제에게 그의 젊은 시절을 일깨우고 보검을 들어 역적들을 토벌하시라 진언한다.

녕국후 일가 = 컵

녕국후 사옥은 이 드라마에서 가장 복잡한 인간 중 하나다. 그는 장공주를 손에 넣기 위해 미약을 썼으며, 결혼을 통해 신분상승을 꾀했다. 또한 아들 경예를 통해 천천산장과도 가족같이 지내며 이를 바탕으로 권력을 강화한다. 변화무쌍하게 모습을 바꾸고, 경계가 없이 잘 뒤섞이며, 감정에 충실한 녕국후와 그의 일가는 컵의 속성으로 보면 이해하기 편하다.

좋아하는 여자를 손에 넣기 위해 미약을 쓴 것은, 그가 사랑에 미숙했던 컵 2였음을 보여준다. 물론 순수한 사랑은 아니지만, 미숙한 사랑이었으니까. 그는 장공주를 사랑하지만, 장공주가 인질로 와 있던 남초국왕의 아이를 임신한 것을 무효로 만들고 싶어한다. 컵 4의 무심해 보이는 모습은 그런 그의 외면을 보여준다. 하지만 컵5와 같이, 그의 작전은 절반만 성공한다. 정확히는 같은 날 태어난 두 아이 중 천천산장의 아이가 목숨을 잃고, 경예는 살아남는다. 하지만 컵6과 같이 경예를 통해 천천산장이라는 강호 무림의 인맥을 손에 넣었으며, 이들은 무림인들 답게 한번 맺은 신의에 충실하다.

녕국후는 컵 7의 인간이다. 그는 자신의 욕망에 눈이 멀어 죄를 짓는다. 때문에 그는 컵 9, 소망의 카드까지 닿지 못한 채, 컵 8과 같이 유배를 당하게 된다. 그는 완성으로 가지 못한 채 유배당하고 죽는다. 그의 야심으로 인해 천천산장의 사람들은 배신을 당했고, 장공주와 그녀의 아이들 역시 연좌만을 면했을 뿐이며, 천천산장의 장남에게 시집보낸 딸은 아이를 낳다가 목숨을 잃는다. 그의 야심은 결국 가족의 행복, 컵 10까지 망쳐버린 셈이다.

녕국후부의 차남이지만 경예의 출생에 얽힌 사건 때문에 실질적으로 장남 대접을 받고 있는 사필은 나이트컵이며, 아버지가 도달하지 못한 킹컵을 향해 천천히 발전하는 캐릭터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퀸컵은 장공주다. 퀸컵은 킹소드과는 대척점에 놓여 있지만, 여왕으로서는 가장 강력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녀는 작품 후반부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경예는 속성만으로는 페이지 컵인데, 경예에 대해서는 다시 설명하겠다.

임수/매장소 = 소드

중국판 랑야방 오프닝에서는 안개가 낀 듯한 배경에 수묵화같은 흰 나비가 날아다닌다.

나비는 변신과 영혼을 뜻한다. 즉 이 오프닝은 임수/매장소의 변신과, 그의 고결함을 의미한다. 또한 변신은 많은 경우 죽음과 재생을 의미한다. 중국에서는 어떤지 모르겠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봄에 처음 본 나비가 흰나비면 누가 죽는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니, 이 나비는 임수의 변신과 더불어 봄눈처럼 짧은 생애도 의미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드라마가 정왕x임수를 대놓고 떠먹여주는 상황인 것을 감안하면 프시케 신화와 같은, 사랑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건 너무 멀리 갔고.

소드 카드의 본편에는 나비가 없는데, 코트 카드에는 나비가 그려져 있다. 소드는 지성과 영혼을 상징하고 원소 속성으로는 공기를 의미한다. 매장소의 지략과 신선과 같은 탈속적인 모습들은 이 소드의 전형적인 속성이다.

소드는 감정적으로 가장 고통받는 카드다. 그는 소드 2와 같이, 죽음과 삶이라는 양자택일의 갈등 속에서 변신이라는 제 3의 길을 택할 수 밖에 없었고, 소드 3과 같이 배신당했다. 소드 4의, 죽음과도 같은 휴식은 그의 고통스러운 투병=변신을 의미한다. 소드 5와 같이, 그는 대가를 치러야 했으며(무공을 잃고, 요절할 운명이 되었다) 소드 6과 같이 무리하지 않고 순리에 몸을 맡겨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소드 7과 같이 위험을 무릅쓰고 세상에 나오기로 한다. 여전히 소드 8과 같은 속박에 휘감겨 있으며(약한 몸 때문에 마음대로 움직일 수 조차 없다) 소드 9와 같은 마음의 고통을 계속해서 감내하고 있다. 그리고 소드 10과 같이, 희망을 남기고 죽음을 맞이한다.

그는 소년장수 임수일때는 용감하고 빠르며 쾌활한 나이트소드였고, 소드의 여행을 통해 변신하여 우울하고 내면을 들여다보며 지혜롭고 냉정한, 필요하다면 모든 사람을 도구로 쓸 수 있는 냉혹한 킹소드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야심 때문이 아닌 내면의 고결함으로 인해 그렇게 행동할 것이다.

퀸소드는 지혜로우며 퀸들 중 유일하게 무력을 쓸 수 있고, 최정안님의 분석으로는 과부/독수공방 속성이 있다. 예황군주다. 빠르고 날렵한 페이지소드는 비류를 의미한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정왕 = 펜타클

펜타클은 땅 속성으로, 여성적이고 정적이며 이성적이다. 정왕의 어머니 정비마마는 바로 이 펜타클 속성 그 자체이며, 땅 속의 씨앗처럼 인내하던 그녀가 마침내 그녀가 정귀비로 승격되는 순간은 9 펜타클에 해당하며, 마침내 퀸 펜타클로 업그레이드 된다.

한편 펜타클은 가장 고지식한 속성이기도 하다. 정왕의 고지식함은 이 부분에서 비롯된다. 그는 4펜타클로 발이 묶인 상태로(동해에 군사 훈련을 하러 갔다), 타로 78장 중에서 가장 비참한 운명을 가리키는 5펜타클, 적염군의 몰락과 기왕과 임수의 죽음을 맞닥뜨리게 된다. 이후 정왕의 인생은 6펜타클의 공명정대함을 따라가지만, 7펜타클과 같이 노력한 만큼의 성과와 칭찬을 되돌려받지 못한다. (황제에게 인정받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8펜타클과 같이 꾸준히 노력하고, 귀비가 된 어머니(9펜타클)와 함께 영광의 자리에 올라 태자가 되고, 나이트펜타클에서 킹펜타클로 업그레이드하며 황제가 되지만, 사회적 성공은 거두었으나 고독한 10펜타클과 같이 그는 임수를 잃고 고독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게 된다.

펜타클은 정적이지만 한번 움직이면 우직하게 나아간다. 그가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가장 빠르고 동적인 소드의 킹, 매장소(임수)가 그의 등을 떠밀며 함께 나아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지막에 그는 혼자 남는다.

메이저 아르카나는 누구를 따라가는가

표면적으로 볼 때 이 드라마는 죽은 것으로 알려진 임수가 매장소가 되어 금릉으로 나아가 정왕의 책사가 되고 그를 왕위에 올리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이야기의 시작과 각종 중요 포인트를 살펴보면, 이야기를 실질적으로 보이지 않게 끌어나가는 중심은 소경예로 볼 수 있다. 메이저 아르카나는 흔히 “광대의 여행”으로 불린다. 이 여행의 주인공인 광대는 처음에는 밝고 명랑하며 낙관적이다. 다소 혼란스럽고 그 앞길에는 위험도 있지만 그는 올곧고 씩씩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경예는 매장소(마법사)와 하동대인(여교황)의 친구이며, 어머니 리양장공주(황후), 외삼촌인 황제(황제), 그의 내관이자 조용히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다른 축인 고담 대인(교황) 등을 만나며 이야기를 이면에서 이끌어간다. 그의 운명은 운명의 수레바퀴(녕국후의 몰락, 경예의 친부가 누군지 알려짐)를 기점으로 뒤바뀌며, 이후 그는 남초로 떠나 몇 화 동안 보이지 않는다. 타로에서는 영혼의 세계, 매달린 남자나 은둔자 등을 만나는 과정으로 표현된다.

그가 다시 현실의 세계로 돌아오는 것은 죽음과 악마, 탑을 경계로 하고 있다. 탑이 무너지며 현실로 돌아오는 카드의 주인공처럼, 그는 하강의 음모와 예왕의 몰락을 기점으로 성숙해진 채 금릉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는 전면에 나서지는 않지만, 그의 응원으로 어머니인 리양장공주가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는 부분에서 타로의 여행을 마치게 된다.

악스트의 듀나님 인터뷰를 읽고

이번 악스트(Axt)의 듀나님 인터뷰를 읽었다. 듀나님은 언제나처럼 오물오물 쿨하셨고(그분의 트위터를 구독하고 있다면 동의할 것이다) 그분을 인터뷰한 백가흠, 배수아, 정용준, 세 작가님들은 흑역사를 쌓으셨다. 정용준님은 진짜 이 인터뷰에 대해, 듀나라는 작가에 대해 뭔가 생각하고 질문을 던지신 것 같지 않았고, 배수아님은 준비를 하시긴 하셨으나 만렙의 무림고수에게 “님 혹시 쌍절곤 쓸 줄 알아요? 내가 보니까 잘나가는 무림인은 다들 쌍절곤을 쓰는 것 같던데!”같은 질문을 하셨고, 백가흠님은…… 그분에 대한 호감도가 바닥을 기었다고 설명해 두자. 익명의 작가에게 자꾸만 사생활에 대해 묻는 것까지야 무례하지만 그런 일들 한두 번 본 것 아니니 어떻게든 넘어간다고 치고, SF에 대해, 순문학계 문단을 통해 데뷔하지 않은 작가에 대해, 굉장한 적대심을 갖고 있는 것이 여기까지 느껴져서 숨이 탁탁 막혔다. 20년된 듀나님의 소설은 여전히 흥미로운데, 상대를 낡았다는 식으로 몰아세우는 한편 “나와 만난 적 있지 않느냐”며 공공연히 자신의 인정욕구를 전시하다니 굉장했다. 혹시 백가흠님, 듀나님한테 경쟁심을 느끼시는 건가? 아니, 경쟁심 느끼실 필요 없다. 둘다 올림픽에 나갔다고 해서 유도선수와 레슬링선수가 굳이 맞장을 뜰 필요는 없으니까.

이 인터뷰의 화룡점정은 바로, 듀나님이 보낸 메일이었다. 듀나님은 메일에서 이 인터뷰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듀나를 모르는 사람과 듀나를 아는 사람에게 이 인터뷰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에 대해 말하며 “웬만하면 이따위 인터뷰는 지면에 싣지 말지?”를 정중하게 돌려서 제의했으나, 악스트는 용감하게도 이 메일까지 모두 싣고 말았다. 그리고 트위터에서 열심히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적어도 내 타임라인의 사람들 대부분은 이 기막힌 인터뷰를 보기 위해 악스트를 살 것이니, 그런 점에서는 나쁘지 않은 기획이었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잡지의 부흥을 위해 이렇게 몸바쳐 뒹구시다니.

처음 읽을 때는 물 없이 고구마를 삼키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이 인터뷰를 한번 읽고 나서, 조금 더 즐겁게 읽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나라고 남의 흑역사 대 전시를 구경하는 게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니까. 이 인터뷰, 특히 백가흠님이 인터뷰한 부분은 일종의 텍스트 퍼포먼스라고 생각하면 좀 즐겁다. 21세기에 살며 여전히 19세기의 마음을 갖고 있는, 상대를 이해할 마음은 없고 상대를 깎아내리려 죽을 힘을 쓰면서도 “나와 만난 적 있지! 나 알지!”하며 대놓고 인정해달라고 떼를 쓰는 한국 중년이 처음으로 외계인을 만났을 때 벌어질만한 상황을 다룬, 일종의 SF라고 생각하면. 그렇다. 우리는 문단작가와 SF작가가 합작한 일종의 퍼포먼스를, 한국인이 외계인을 만났을 때 벌어질만한 일을 본 것이다. 그렇게라도 생각해야 이 인터뷰의 질문들이 그나마 납득할 수 있는 지점까지는 오지 않겠느냔 말이다.

여튼 트위터에서도 별별 키워들이 시비를 걸어와도 초연하게 키보드를 두드리며 격파하시던 듀나님이셨지만, 이번 인터뷰 질문을 메일로 받으셨을 때 대체 어떤 기분이 드셨을지는 상상도 가지 않는다. 음. 과연 악스트에서 또다시 장르작가를 섭외해서 인터뷰를 하는 게 더 빠를까, 아니면 이런 인터뷰를 진심으로 하고 있는 악스트가 망하는게 더 빠를까에 대해 씁쓸한 생각을 하게 되는 초저녁이었다.

쌩신인 그림작가를 위한…… 악당을 피하는 소소한 방법

사실 저도 프로가 된 지 아직 10년 꽉 채운 것도 아니고, 계속 새로운 매체와 방식들이 나오다 보니 언제나 쌩신인같은 마음으로 임하고 있긴 합니다만(물론 나이도 먹었고 경험도 쌓였으며 이런저런 산전수전을 겪으며 계약서 독해력은 비약적으로 상승하긴 했습니다) 진짜 쌩신인 분들을 위해 조금은 할 말이 있을 것 같아서 다시 신새벽에 블로그에 글을 쓰고 있어요.

일단 지난번 언급했던 쌩신인 그림작가를 위한 “상태가 나쁘지 않은” 스토리작가 고르기 이후로 그림작가님들의 문의가 좀 들어오고 있습니다. 사실 작년에 웹툰업체들이 굉장히 많이 생기면서 그림작가님들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 같이 일하자는 문의면 좋겠는데 그건 아니고. 주로 이러저러한 분이 스토리를 줄 테니 같이 일하자고 제안이 들어왔는데…… 하면서 상의를 하는 이야기죠. 예, 제가 애를 업고 있다 보니 바로바로 대답해드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문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르면 먼저 그 일을 하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되는 일이에요.

그나저나 어처구니없는 사례들은 어쩌면 이렇게 천편일률 똑같은지. 누가 그런거 가르쳐서 내보내는 학원이라도 있나 싶을 정도이긴 합니다. 대체로 이런거죠.

  1. 내가 잘나가는 스토리 작가다…… 이긴 한데 만화로 낸 실적은 없이 판타지 쪽만 내신 작가님. (책 내신 분들부터 X피아 연재중인 작가도 있고. 근데 성함을 여쭤보면 대체로 뭔가 대박을 내신 작가님은 아닌것 같습니다. 제가 지난번에도 말했죠. 쌩신인 그림작가 앞에 세계구급 존잘님이 짠 하고 나타나는 건 요즘은 로설에서도 식상할 이야기입니다. 요새는 웹툰으로 이야기가 나가면 원작 매출이 올라가기 때문에 그걸 노리고 일단 웹툰화하는 작품들도 있는 것으로 알아요. 뭐 그건 좋은데, 웹툰을 그냥 자기 소설의 홍보용으로만 생각하는 작가와 일하는건 글쎄요.)
  2. 나랑 웹툰을 하자. 내가 어디 PD랑 이야기해서 연재처 따오겠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계약을 글작가에게만 맡겨두지 마세요, 절대로. 선배작가가 알아서 잘 하겠지? 그런거 없어요. 자기 권리는 자기가 챙겨야 합니다. 님은 도장찍는 셔틀이 아닙니다.)
  3. 내가 원작도 주고 연재처도 따왔으니 페이는 반반으로 하자. 혹은 4를 하겠다…… 근데 그림콘티 그거 먹는건가요 우걱우걱 (그림콘티를 짜진 않더라도 짤 줄은 아는 사람과 일하세요. 소설의 연출과 공간감과 만화의 연출과 공간감은 좀 다릅니다.)
  4. 내 원작을 내가 각색해서 콘티로 제공할 건데 내 원작비는 매번 고료에서 차감할 것이다…… (물론 원작비라는 게 있습니다. 그러나 매번 고료에서 뗄 만한 것도 아니고, 실제로 소설을 만화화 할 때의 원작비는 대개 어마무지하게 비싸진 않습니다……)
  5. 넌 나 아니었으면 데뷔도 못 했을 신인이 블라블라 (……그런 말을 하는 놈이 쓰레기죠.)

하지마세요.

말했죠? 지금 웹툰업체가 많이 생기면서 스토리작가는 많고 그림작가는 오히려 부족한 상황입니다. 웹툰으로 포털에 연재할 수 있을 만한 그림이고, 꾸준히 마감을 할 능력이 되신다면 더 좋은데서 더 좋은 조건으로 하실 수 있어요. 물론 4:6, 5:5를 하게 되는 경우가 있긴 있는데 그건 스토리작가가 기획과 담당을 겸하면서 그림작가를 스태프로 쓰는 경우 같은 거고, 제게 문의하신 분들은 그 케이스들은 분명 아니었고요.

그리고 작가가 데뷔를 시켜줘요? 뭐, 물론 그럴 수도 있겠죠. 편집부는 늘 좋은 작가들에 목이 말라 있고, 이미 검증이 된 다른 작가가 이 사람 괜찮다고 추천할 수는 있어요. 저도 가끔, 데뷔할 마음이 있는 야생의 존잘님들을 편집부에 소개하곤 하니까요. 저런 야생의 존잘님이 계신데 저는 저분이 원고료를 받으면서 일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욕망으로 하는 짓이니까요. 물론 그 작가님들 대부분은 제가 소개한 걸 모릅니다. 알아도 크리스마스 카드 받는 정도예요. 아, 소개한 작가님이 상업지로 데뷔했을 때 좋은 작가 소개해줘서 고맙다고 편집부에서 밥 얻어먹은 적은 있네요. 소개비를 받아요? 뭐, 그 작가가 에이전시를 차리고 그 에이전시에서 사람을 밀어넣는 거라면 모르겠네요. 근데 그런 거라면 그 작가와 정식으로 에이전시 계약을 맺으시는 게 맞죠.

그럼 이런 일을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러 방법이 있긴 한데, 편한 방법으로는 좋은 회사를 만나시면 좀 수월하겠네요.

말했지만 그림작가님이 부족하다니까요. 아니, 부족하지 않아도. 스토리작가는 한번에 세 편 네 편도 진행할 수 있지만 그림작가는 그게 어렵습니다. 그렇다보니 업체에서도 그림작가님들 수요는 늘 있는 것으로 알아요. (그리고 그 점 때문에 일부러 그림작가를 후려치기하는 놈들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마치, 운좋게 자기보다 잘난 여자와 사귀면서 그 여자에게 “나 아니면 너같은 거 누가 사귀어 주기나 할 것 같냐”고 계속 세뇌하는 놈들과 비슷하죠. 아이고, 그냥 나가 죽으라고 권하고 싶네요.)

에이전시와 계약할 때 기준이, 제가 웹툰 쪽 알아보려고 할 때 에이전시들은 어떻게 하나 몇군데 알아본 바로는 대개, 연재처에서 지불하는 회당 고료에서 에이전시 수수료 10%를 떼고 고료를 받으며, 연재고료 외의 전자출판이나 단행본 매출에 대해서는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단행본은 정가의 8~10%, 전자출판이나 수출이나 드라마화나 뭐 그런 것에 대해서는 제반비용을 떼고 난 매출액의 50~70%를 받게 되어 있더군요. 그리고 여기서 글과 그림이 수익분배를 하죠. 물론 에이전시 수수료에는 작가를 관리하고, 글작가와 그림작가를 연결시켜주고, 연재처를 알아봐 주고, 홍보를 해 주는 등등의 비용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2년 전에 알아본 것이니 현재와 조금 다를 수도 있긴 한데, 생각만큼 문턱이 높지 않으니까 가능하면 웹툰을 연재하고 있는 다른 작가들에게 좋은 업체를 물어봐서 일단 문이라도 두드려 보세요.

그리고 지금 웹툰 쪽은…… 불길한 생각을 하고 싶진 않지만 90년대 후반에 잡지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던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데요.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서 별별 사람들이 다 뛰어들기 시작하고. 수상한 업체들도 생겨나는 게 당연한 일이겠습니다만. 시장이 어려워졌을 때 발을 빼버리는 것은 물론, 작가와 작품들이 공중에 붕 떠버려도 수습하지 않거나, 더 나쁘게는 자기들의 채무를 대신하여 그걸 다른 업체로 넘겨버리거나……. 별별 상황이 다 일어날 수 있죠. 그러니 시장이 확대된 지금은 더 신중하게 움직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작가와 작품을 소중히 여기고, 가능한 한 끝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은 곳을 선택하세요.

제가 참;;;;; 그런 사례 들을 때 마다 물 없이 고구마를 먹는 것 처럼 가슴이 턱턱 막힙니다만. 말씀드리지만 그런 자들은 일부니까 다들 힘내세요. 잘 모르겠는 것은 이미 데뷔한 다른 작가에게도 물어보시고, 카툰부머처럼 데뷔한 작가들이 있는 커뮤니티에 문의해 보셔도 되고요. (지망생만 있는 곳에는 유언비어가 많습니다) 확실히 문제가 있겠다고 생각하시면 만협과 상의하시면 좋을 것 같고요.

스타워즈 : 레아 공주 – 마크 웨이드 글, 테리 도슨 그림, 시공사

스타워즈 : 레아 공주10점
마크 웨이드 글, 테리 도슨 그림, 임태현 옮김/시공사(만화)

꼬꼬마와 함께 읽은 첫번째 스타워즈 그래픽노블.

에피소드 4와 5 사이에서 레아 공주의 성장을 그린 그래픽노블이다. 4에서 레아는 반란군과 함께 싸웠고, 많은 우여곡절 끝에 데스 스타의 설계도를 빼내는 데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모성 알데란이 파괴되는 것을 보아야 했다. 야빈 전투 이후, 레아는 수배자가 되었으며 살아남은 알데란인들 역시 제국의 보복을 받을 위험에 처했다.

이 코믹스의 레아는 바로 그 알데란 생존자들을 구하기 위해 움직인다. 코믹스의 앞부분에서 그녀는 지도자들에게 그다지 신뢰받지 못하지만, 생존자들을 구해내고, 고리타분한 순혈주의에 맞서고, 할 수 있는 한 많은 이들을 구하며 레아는 성장한 뒤 다시 반란군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야기는 에피소드 5로 이어진다.

물론 꼬꼬마는 아직 이 내용을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나는 가급적이면 여자아이가 보는 첫번째 그래픽노블의 영웅이 이 책의 레아처럼 현명하고 활기찬 소녀 영웅이었으면 좋겠다. 꼬꼬마는 아직 이 책을 읽기보다는 물어뜯고 싶어했지만, 그래도 무릎에 앉혀놓고 함께 읽었다.

플레이 Play – 김재훈, 신기주, 민음사

플레이10점
김재훈 카툰, 신기주 글/민음사

넥슨의 게임을 좋아하든, 돈슨이라고 손가락질하든 상관없이, 넥슨의 역사는 한국 온라인게임의 역사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할 수 밖에 없다. 일단 바람의 나라부터 시작해서. 물론 나는 김진 선생님의 오랜 팬이고, 그 게임이 나온 것은 알았어도 실제로 아이디를 만들게 된 것은 대학에 간 이후이긴 했지만, 그 존재에 대해서는 늘 알고 있었다. 일단 하우피씨와 함께, 염불보다는 잿밥(부록 CD)에 더 관심이 있긴 했어도 어쨌든 게임피아를 보고 있었으니까.

대략 2014년 정도부터, 한국 인터넷의 아버지, 전길남 박사를 띄우고, 그 다음에는 그분의 제자들이 차린 넥슨의 역사를 되짚는 게시물들을 볼 수 있었다. 뭐, 없는 말을 지어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넥슨은 한국 인터넷의 역사를 넥슨의 역사로 만들고자 하고 있다는 느낌도 받았다. 제주도에 있는, 정말 잘 만들어졌고 자료가 많았으며 건강과 시간만 허락하면 몇시간은 더 놀 수 있었을(그때 나는 임산부였고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1년에 1주도 눈이 안 내린다는 그 제주도에서) 그 멋진 “넥슨 컴퓨터 박물관”도 그렇다. 넥슨은 한국 인터넷과 소프트웨어 역사의 적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사실 박물관처럼, 만드는 데도 관리하는 데도 돈은 많이 드는데 정작 그걸로 돈은 안 벌리는 것을 만드는 데는, 우리가 이 역사의 주인공이라는 일종의 마일스톤을 박고 가려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넥슨 컴퓨터박물관에 다녀오고 꼭 1년만에, 나는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하필 펼친 페이지가 넥슨 김정주 회장이 바로 그 송재경님을 꼬시는 것을 묘사한 만화 페이지(어째서인지 굉장히 “라면먹고갈래”같은 분위기로 그려져 있었다)였다. 솔직히 말하면 그 페이지가 마음에 들어서 책을 구입했고, 당장 급한 책은 아니어서 며칠 묵혔다가 해를 넘기기 전에, 12월 30일쯤에 차분히 앉아서(물론 등 뒤에 아기가 매달려 있었다) 읽었다.

넥슨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그동안 읽었던 기사 같은 것을 통해 대충은 알고 있었다. 홈페이지가 최신기술이던 그때 그 시절, 홈페이지 하청업체도 했다는 것은 몰랐지만.

바람의 나라가 만들어진 부분도 얼추 알고 있었다. 게임의 팬 이전에 선생님의 팬이니까. 설마 처음에는 50명이 동시에 접속한다고 서버가 뻗었을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퀴즈퀴즈가 나온 대목에서는 웃었다. 학교 다닐때 선배가 퀴즈퀴즈에 들어갈 문제 데이터를 만드는 알바를 한다면서 내게 문제 100개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거든. 그럼 학교 앞 해와달 분식에서 밥을 사달라고 했는데 학관에서 때운 관계로 문제를 굉장히 날림으로 만들어 준 적이 있었다. 이 퀴즈퀴즈의 “유료화”대목을 보며 돈슨이라고 낄낄거리며 읽었다. 아바타 꾸미기라니, 세이클럽에서 시작했고, 온갖 곳에서 다 아바타 꾸미는 게 유행하던 그때 그 시절 생각이 났는데, 역시 아바타 꾸미기로 돈을 버는 거라면 넥슨보다는 싸이월드가 대세였으므로 아직 돈슨이라고 낄낄거리긴 이르다. 더 읽어야 한다. 그나저나 바로 이 대목에 마비노기의 나크님이 입사한 날이 떡하니 박제되어 있었다. 어쩐지 며칠 전에 트위터에 근속기념패 같은것 인증짤이 올라오더나.

크레이지 아케이드며 메이플 스토리같은, 잠깐 했거나 동생이 하던 게임들 이야기와 함께, 기업이 커나가는 과정을 읽는다. 그러다가 무려 공무원 시험준비할때 하루에 두시간씩 무료를 풀로 채워서 하다가, 합격한 그날로 정액결제를 시작했던 마비노기가 보인다. 전에 다니던 회사의 직장상사가 숨어서 하시던 던파가 보인다. 그리고 게임과 함께 덩치가 커진 회사의 위기와 역사를 읽다 보니 단숨에 한 권을 다 읽어버렸다.

사실 이 이야기는 한 기업의 역사이고, 당연히 그 주역들이 도전의 주인공으로 멋지고 폼나게 등장할 수 밖에 없는 책이기도 하다. 그런 점을 감안해서 읽더라도, 이 책은 한 기업의 역사 이전에, 온라인 게임을 즐기며 나이들고 있는 유저가 추억을 되짚는 역사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게임을 할 무렵에 무슨 일이 있었고, 내가 좋아했던 이 게임이 만들어질 때 누가 어떤 일을 했는지에 대해 아주 조금이라도 들여다볼 수 있는. 물론 그런 것 치고는, 게이머가 자기가 좋아하는 게임의 역사를 들여다보기에는 회사의 역사가 강하고, 기업의 역사와 발전을 보기 위해 읽기에는 조금 말랑말랑한 맛이 많지만.

사람도 기업도 게임도, 어느정도 업적을 찍고 나면 자신의 마일스톤을 놓고 가고 싶어할 것이다. 그것도 20주년같이, 연차만 보면 더는 “어린/젊은”기업으로 분류될 수 없는 시기가 오면. 넥슨은 더러는 우습고 더러는 귀엽게, 자신들의 역사가 한국 게임의 역사이고 한국 인터넷의 적자라는 듯이 박물관을 만들고, 만화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 책이 나왔다. 여전히, 맨 처음 나왔던 그 바람의 나라는 잘 돌아가고 있는 것 같고, 완전 초기모델은 제주도에서 돌고 있고, 넥슨은 다양한 과금으로 유저의 지갑을 털 궁리에 매진하며 더러는 귀엽고 더러는 재미있는 게임들을 만들고 있다.

그러니까 뭐, 이 정도의 자화자찬은 읽어줄 만 하다고 생각한다. 나도 지금까지 넥슨의 게임으로 즐거운 시간을 많이 보냈(고 카드도 많이 긁었)으니.

셜록 – 유령 신부 (네타 잔뜩 포함)

새벽에 BBC를 보고 나면 7시 10분 정도에 끝날 텐데, 동네에서 영화가 7시 20분 시작이었다. 실제 시작은 30분 정도. BBC쪽을 보고 달려가서 영화를 볼까 하다가, 시간이 애매해서 영화만 보기로 했다. 동네 CGV라서 덕후들이 단체로 열광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묘하게 가족단위 관객이 많았다.

가족단위 관객이 새벽부터 이토록 미묘한 것을 보고 갔어. (눈물)

일단, 포스터만 보면 묘하게 우는 천사를 연상하게 되는 이 유령신부는 빅토리안 고딕 호러라는, 마크 게이티스의 또 하나의 덕질 스탯을 채워주는 작품이 될 거라고 예상하긴 했다. 사건이나 추리 자체는 굉장히 심플하며, 그에 대한 떡밥 역시 대단히 심플하고 클리셰에 충실해서, 첫번째 사건에서는 누가 협력자인지, 어떻게 시체가 움직였는지 알 수 있고, 두번째 사건의 피해자인 유스티스가 죽은 시점에서는 갯강구도 범인을 알 수 있을 것 정도다. 다만 (이하 네타) 두번째 사건과 함께, 이 사뭇 단단해보이는 19세기 빅토리안 고딕 호러의 세계에 균열이 일어난다. 마이크로프트가 “네 데이터, 바이러스”같은 말(19세기에 쓰일 리 없는)을 하고, “리스트를 작성하라”는 말을 한다. 죽은 유스티스의 시신에는 처음 발견되었을 때는 없는 “miss me?” 라는 쪽지가 걸려 있다. 여기까지 오면 관객은 반전을 예측하면서도 설마 그럴까 하며 혼란스러워진다. 애초에 유령 신부 자체가, 203의 모리어티와 같은 식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과 함께 셜록은 모리어티와 만나게 된다. 자기 방에서, 끈적한 섹드립을 날려주시는, 죽은 라이벌의 존재와 함께 그의 의식은 현대로 돌아온다. 303에서 출발하자마자 회항한 비행기와 함께, 공항에 무사히 착륙하는 것이다.

그리고 관객은 경악하고, 동시에 웃기고 슬픈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새끼들 동인지의 스케일이 왜 이렇게 커져. 그렇습니다. 이 영화는 코난 도일의 정전에 바치는 팬보이들의 동인지가 아닙니다. 자기들이 만들어 낸 셜록 세계관에 대한 셀프 동인지죠. 그리고 이때부터 셜록은, 19세기에는 코카인 7%용액에 절어 있고, 21세기에는 형님의 지시에 따라 사용한 향정신성 약물 리스트를 적어 품에 넣은 채로 혼수상태에 빠진 채 두 세계를 넘나들며 자신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19세기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려 애쓴다.

그렇게만 말하면 참 좋겠지만.

좋다, 이 이야기는 추리가 아니라, 모에를 보는 서비스 서비스 스페셜이다. 코난 도일이 낳아 자신들이 때 빼고 광 내어 재구성한 주인공들에게 빅토리안 코스튬을 입히고 싶은 제작진의 비뚤어진 욕망이 전세계를 낚은 결과물이라고 보면 되겠는데, 난 빅토리안 고딕 호러 덕후라는 점에서 이번 일의 악당은 모팻이 아니라 마크 게이티스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런데다 마크 게이티스는 이번 욕망으로 진정 자신의 욕망을 화면에 양동이로 들이붓고 있었는데, 예를 들면이런 식이다.

두번째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 존이 셜록의 욕망에 대해 물으며 “누가 너를 이렇게 만든 것이냐”고 묻는다. 셜록은 “누구도 나를 이렇게 만들지 않았다. 내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모든 면면에서 셜록의 ‘고기능성 소시오패스적’ 인격은 굉장히, 진정한 사이코패스 통제광이자 바뚤어진 동생사랑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마이크로프트에 의해 정밀하게 통제되고 만들어졌으며, 여기에 모리어티에 의해 “정밀한 기계에 금이 가듯(이 대사는 모두가 알다시피 원작의 “보헤미아 왕의 스캔들” – 저 아이린 애들러가 나오는 – 에서 셜록 홈즈가 연애를 하지 않는 이유로 나온디) 에러가 생긴 상태다. 세상에, 이것만 해도 웃겨 죽겠는데, 19세기의 마이크로프트는 적어도 200kg은 가뿐히 넘어 보이는 육중한 몸에, 푸짐한 식사를 하고도 푸딩을 몇 개씩 집어먹으며, 안락의자 탐정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안락의자에서 못 일어나서 할 것 같은 상태로 디오게네스 클럽을 이끌고 있다. 물론 통제광인 만큼 디오게네스 클럽은 여전히 공동 공간에서는 소리를 낼 수 없는 곳이고, 셜록은 이곳의 컨시어지와 수화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뭐, 이것 자체는 원작의 마이크로프트 재현이긴 하지만.

그 끝없이 음식을 먹고 있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그로 인해 “실시간으로 수명이 줄어드는”것에 대해 셜록이 경고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먹고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21세기의 마이크로프트는 다이어트에 성공하고, 19세기는 성공은 고사하고 끝없이 먹는 쪽이 된 것일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점을 성욕과 식욕의 등가교환으로 보면 흥미로워진다. 21세기의 게이와는 달리 19세기의 게이는 자신의 욕구를 굉장히 비정상적이고 범죄적이며 신성모독적인 죄악으로 받아들여야 했을 것이다. 앨런 튜링만 해도 그렇지. 즉 21세기의 마이크로프트가 어디선가 욕구를 해소할 상대라도 찾는 동안에, 19세기의 마이크로프트는, 자기 동생과 달리 향정신성 약물 탐닉으로 빠지는 대신 탐식으로 흘러갔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이 점에 대해 결론을 내리자면.

마크 게이티스는 최애캐 차애캐 떡쳐라도 아니고 그냥 자기가 최애캐에 깊이 이입해서 차애캐와 이루지 못할 사랑에 몸부림치는 내용을 직접 쓴 뒤 스스로 그 역을 맡고 계심. 이 시대의 진정 난 분이심.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음. 과거에도 현재에도 일관된 형님의 저 비뚤어진 동생 사랑이라니.

물론 그렇다고 이 영화가 셜마셜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제작자의 최애캐가 마이크로프트요 차애캐가 셜록이라고 해도, 대놓고 근친을 팔 수는 없는 일. 형님은 그냥 욕구불만 통제광으로 족하다. 동생의 안전을 위해서라는 버젓한 이유가 있겠지만 사용한 약물 리스트를 굳이 알아내고, 그걸 북 찢어 버리고 가는 셜록의 뒤를 따라가는 대신 그 찢어진 메모를 소중하게 “redbeard”가 적힌 자기 수첩 사이에 끼워넣는. (그러고 보니 형님의 수첩에는 행렬 같은 게 하나 있었는데, 짧게 지나갔지만 0과 1로만 되어 있던 것 같고. 뭔가의 압축코드나 그런 걸까. 여튼 형님의 수첩이나 셜록의 약물 리스트 같은 것은 누군가 드라마를 돌려보고 분석해 주실 거라고 믿는다. 지금 그 짓을 하기엔 이번 연휴동안 해야 할 일이 있다.)

대신 이 영화에서는 “유혹자”로서의 모리어티와 “구원자”로서의 존 왓슨이 존재한다. 셜록의 머릿속, 19세기 런던으로 확장된 마인드팰리스 안에서도 계속 그를 미혹하는 모리어티는 마침내 라이헨바흐 폭포(303에서는 라이헨바흐 폭포 그림을 셜록의 추리로 되찾았는데, 영화에서는 이 그림이 형님의 디오게네스 클럽 전용룸 안에 걸려있다)에서 셜록과 대면한다. 원작에서 권투의 달인이었던 셜록은 허당처럼 두들겨 맞고, 그때 존 왓슨이 나타난다. 그 103의 수영잔 씬의 정확한 대치로서, “내 친구에게서 떨어지라”고 말하면서. 모리어티를 폭포 아래로 걷어차 버리는 것 역시, 존 왓슨이다. 그리고 존에게서 구원받은, 다시 말해 모리어티의 자극적인 “악”에 미혹되면서도 이번에도 존으로 인해 어둠으로 끌려가지 않은 셜록 홈즈는 자유로워져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라이헨바흐 폭포에서 뛰어내리고 현실로 돌아온다.

이 무슨 존 왓슨은……. 이렇게 고통받고…….(부들부들)

여튼 빅토리안 고딕 호러로 시작한 사건은 기묘하게도 페미니즘, 가부장제에 저항하는 형태로 끝나고, 그에 대한 떡밥은 시작부터 계속 나왔으며(몰리 후퍼 언니 날 가져요) 메리 모스턴은 현실에서도 19세기에도 의외로 굉장히 능력있는 협력자로 나오지만, 모팻은 어설프게 페미니즘을 말하고 싶으면 그냥 19세기다운 걸 하는 편이 나았을 것 같다. 사건 자체는 별로 기대할 만한 것이 아니라 다시 보더라도 사건, 추리 파트는 스킵하게 될 것 같고, 동인지로서는 굉장함. 세계구급 동인지쯤 됩니다. 팬보이들이 만든 팬들을 위한 끝내주는 영화임.

여튼 오늘의 감상. 성공한 덕후가 되어서 최애배우로 최애캐 모에모에 스페셜을 찍는 인생 좋군요.

보통 날의 스타일북 – 기쿠치 교코, 김혜영, 비타북스

보통날의 스타일북 봄-여름 Spring-Summer10점
기쿠치 교코 지음, 김혜영 옮김/비타북스

새해 첫날은 번잡하고 소소하게 할 일이 많아서, 독서라고 각 잡고 읽은 것은 이런 스타일북.

작년 초에 봄-여름 편을 먼저 사고, 10월에 가을-겨울 편도 마저 샀는데, 저자의 1년동안의 옷 입기 기록을 통해 “매일 다른 옷을 위 아래 세트로 맞춰 입는 게 아니라, 몇 종류의 입을 한 주 동안 돌려입는” 방법을 매우 실제적으로 보여준 책이다. 일단 사토리얼리스트같은 책들과 같은 길거리 멋쟁이를 찍은 책들과는 달리, 실제로 현실에 써먹을 여지가 있다는 것이 좋다. 물론 이 책에 제시된 그대로 입으려면 지금보다 최소 5cm는 더 자라거나, 혹은 10cm 힐을 신어야 할 거고 골반도 줄어들어야 할 것 같지만. 일단 그렇다는 거다. 세어보면 계속 가방이며 티셔츠, 목걸이가 겹치는데 1년내내 같은 조합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이 책의 매력. 스타일리스트다 보니 일반 직장인보다는 옷차림이 조금 자유로운 면도 있겠지만, 이 분도 “현장”에만 일하러 가는 게 아니다 보니 점잖게 입은 조합들, 사무실에 입고 가도 무난한 조합들도 적잖이 보인다.

새해 첫 날 이 책을 읽으면서, 취직을 한 이후의 옷들이 퇴적층대를 이루며 쌓여 있는 행거를 들여다 보았다. 올해는 복직을 할 텐데, 안 맞는 옷들, 안 맞을 것 같은 옷들, 맞아도 슬슬 안 어울릴 것 같은 옷들을 싹 처분하고, 잘 어울리고 몸에 잘 맞는 옷들을 하나씩 채워야겠다는 생각을 좀 했다. 옷을 이렇게 저렇게 돌려 입으라는 충고는 여기저기서 많이 보고 듣지만, 실제로 1년동안 가능한 것을 보고 나니 해볼 만 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갖고있는 것의 품질이나 디자인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겠지만, 내가 1년동안 끄집어냈다가 도로 걸었다 하는 옷의 가짓수가 여기 나온 것보다는 많을 것 같다는 점에서. 옷장정리의 필요성도 새삼 느꼈고. 무엇보다도 어릴 때 지방에서 살고 돈은 없을 때 친정에서 가져온, 남동생이 군대 가기 전에 입고 처박아놓은 옷들은 올해 반드시 갖다버리기로 다짐했다.

2015년 크리스마스 이브

20151224크리스마스이브

꼬꼬마가 태어나고 첫 크리스마스 이브입니다.

낮에는 할머니 할아버지께 서비스라며 외가에 다녀왔는데, 도짱님께서 전에 물려주신 루돌프 옷이나 입혀볼까 하고 꺼냈더니 그새 키가 자라서 못 입혔어요. 결국 “루돌프를 잡아먹은 우리 아기” 컨셉으로 사진이나 몇 장 찍은 뒤 적당히 입혀서 데리고 나갔습니다. 딸들 둘이 결혼들을 하고 나니 케이크 하나 사들고 오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쯧. 꼬꼬마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왕래도 거의 없었다 보니 얼마만에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사들고 가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좀, 화해하자고 할 때 순순히 화해하셨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꼭 굳이 꼬꼬마가 태어날 때 까지 버티시더니 아기 태어났다고 하자마자 산부인과에 달려오셔서는 그동안은 거들떠도 안 보던 사위의 손을 잡고 아이고 수고했네라니……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죠.

사실 스타워즈 케이크도 혹했습니다만 이번 것은 사위가 장인어른께 사들고 가기에는 특히 적절치 못하죠. 적당히 집 근처 투썸에서 딸기케이크 사갔고, 점심식사를 함께 하고 돌아왔습니다.

크리스마스 선물은 각자 하나씩 받을 수 있도록 준비했는데, 꼬꼬마가 좀 더 자라면 다른 방식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꼬꼬마에게는 핑크퐁 사운드북을 사줬는데, 제가 확신하는데 이녀석 책보다 그 상자를 더 좋아할 겁니다. 늘 컴퓨터 주변기기를 하나씩 사주던 세이는 올해들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팔찌와 목걸이를 준비했더라고요. 저는 세이에게 아로마보이 커피메이커를 사줬는데, 밀리타 코리아가 좀 대인배였어요. 새벽에 주문을 했는데, 점심무렵에 전화가 왔습니다.

“실은 오늘 점심때부터 아로마보이 패키지 세일을 할 거예요. 그런데 새벽에 주문하셨더라고요. 나중에 보시면 속상하실 것 같은데, 결제 부분취소 하고 패키지로 바꿔드릴께요.”

왜 거부하겠습니까. 본체 가격보다 저렴한 가격에 커피 두가지와 필터 두상자를 주는데. 실은 제가 본체와 커피 세가지, 필터 한상자를 주문했는데, 돌려받은 금액이 원래 결제했던 금액의 거의 반값이었어요. 전에 아밀님이 말씀하신 것을 보고 기억해 뒀다가 산 것이지만, 오늘 저녁식사 후에 시험해 봤는데 역시 괜찮았어요. 속도도, 향도. 저는 커피를 잘 안 마시니까 세이에게 물어봤는데 맛도.

꼬꼬마는 다행히 8시 좀 넘어가면 잠이 듭니다. 8시 무렵에 방 불을 끄고 나오면 침대에서 혼자 뒹굴거리며 손가락을 빨다가 15분 안에 잠이 들어요. 얼른 저녁식사를 준비해야 하다 보니 올해는 심지어는 파스타조차도 면 따로 삶아서 소스 얹어 내지 못하고, 그냥 소스와 함께 넣고 3분 볶으면 된다는 미트소스 파스타를 사다가 야채만 추가해서 준비했어요. 와인잔도 하나 깨먹어서 유빅 컵을 꺼내고, 파스타 볼은 저 위에 있는데 그걸 꺼내기가 귀찮아서 우리집에서는 비빔밥 해 먹을 때 쓰는 중식면기에 담고. 와인과 탄산수, 파스타. 샐러드. 그리고 촛불. 다 준비하고 보니 메인디시라 할 만한 육류는 하나도 없었습니다만 10분 안에 준비가 끝났는데 무슨 상관이겠어요. 사이좋게 저녁 먹고 차와 커피 마시고. 이제 일해야죠, 일. 세이가 꼬꼬마를 돌봐줄 때 일해야 하니까요. 메리 크리스마스.

쌩신인 그림작가를 위한 “상태가 나쁘지 않은” 스토리작가 고르기

그림작가 찾는 스토리작가가 저렇게 많은 와중에 옥석을 골라내진 않더라도 말이죠, 그림은 스토리보다 몇 배의 노고가 들어가는 작업입니다. 적어도 똥은 밟지 않아야죠. 자칫 죽어라 한 작업, 고료도 제대로 못 받고, 고생은 잔뜩 하고 욕만 먹는 경우도 허다할 텐데요. 여튼 그런 마음에서, 저도 별로 아는 건 없지만 그래도 대충 데뷔한지 9년, 콘티 만들기 시작한 지 7년쯤 되었으니까 아는 것만 간단히 몇 자 적어볼께요.

뭐 가끔은 잉여취급 당하는 건 좀 억울합니다만, 콘티도 못 짜면서 자기가 아이디어만 갖고 있다고 스토리작가 행세하는 사람도 보긴 봤으니까 이해가 안가는건 아닙니다. 기획자 지망생이니 스토리작가 지망생이니 중에는 사실 진짜 열의를 갖고 많은 준비를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만, 적지 않은 수가 “자기는 할 줄 아는 게 없이 머리 노릇만 하고 싶어하는” 분들이라서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밴드 하겠다고 사람 모집하면서 기타, 베이스, 드럼 모집하는 애들. 자기가 얼굴마담 겸 보컬 하고 싶다 이거죠. 그런데 그렇게 얼굴마담만 하고 싶어하는 애들 중 상당수가 악보도 못 본다는 사실. (진지)

그럼 일단. 어떤 작가가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작가가 적어도 기본적으로 세계관을 만들고 캐릭터를 만들고 그 세계와 그 캐릭터로 이야기를 굴려 나갈 기본적인 능력이 있다고 생각할 때, 이걸 소설로 푸는 방법과 만화스토리로 푸는 방법은 좀 다릅니다. 예를 들어서 저는 소설도 쓰고 만화스토리도 쓰고 있는데요, 어떤 이야기는 그냥 바로 콘티로 나와요. 어떤 이야기는 소설 초고 형태로 쓴 뒤에 콘티로 나오고요. 스토리의 밀도라든가 장르라든가 내용이라든가 가끔은 기분에 따라서 출력 방향이 다르게 가더라고요. 물론 콘티로 짠 걸 소설로 다시 만들거나 소설 초고로 쓴 걸 다시 콘티로 만들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만화 스토리를 쓴다는 건, 적어도 콘티를 짤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거죠. 물론 시나리오로 넘기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적어도 그냥 소설 줄글로 넘겨선 안됩니다. 지문이 아니라 대사와 연출이 주가 되니까요. 그래서 적어도 글말과 입말을 분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공간감각도 조금은 있어야 하고요. 컷 안에서 대갈치기만 할 수는 없잖습니까. 연출력은 당연히 있어야 합니다.

설령 자기가 연출 잡아서 콘티까지 하지 않고, 시나리오 형태로 넘긴다고 하더라도 콘티를 짤 줄은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분량 가늠을 못 하거든요. 28페이지 그려야 하는데 40페이지 가져와서 욱여넣으려고 그럴겁니다. 그럼 곤란하죠. 어떻게 아냐고요? 제가 처음에! 이만큼이면 28페이지에 들어가겠지 하고 이야기를 끊어놓고 쓰다 보니 이게 60페이지가 넘어갔더라는 처절한 삽질을 한 적이 있어서 알지요!

그 두가지가 안 되면, 그 사람은 그냥 원작을 쓰는 게 빠를 겁니다. 적어도 갖고있는 이야기를 전부 대사와 표정, 연출만으로 바꿀 수는 있어야 하고 분량 가늠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해요.

자기가 직접 이야기 쓰고 콘티 짜는 만화가들이 많이 계십니다. 이분들은 어차피 날려서 써도 자기가 그릴 거니까 상관없어요. 스토리작가는 그림작가에게 그 콘티를 넘겨서 이해시켜야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담당님도 설득해야 하고요.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그리든가, 시나리오를 세세하게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참고로 글씨를 날려썼다고 빠꾸먹은 적도 쿨럭쿨럭쿨럭…… 여튼 협업에 맞게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신인 그림작가 앞에 나타나는 스토리작가는, 대개는 스토리작가의 이름값만으로도 책을 팔 수 있을 만큼의 어마어마한 분이 아닙니다. 7:3이에요. 원작이 따로 있으면 8:2로 잡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그렇습니다. 물론 큰 쪽이 그림 쪽이고요. 어마어마한 슈퍼슈퍼 존잘님이 먼저 컨택해 오신다면 뭐 6:4도 가능하다고 듣기는 했는데 아직 신인이신 님 앞에는 그런 슈퍼슈퍼 존잘님이 나타나시지 않습니다!!!!!

스토리작가에게 끌려가시는게 아니라면. 중간에서 조율하고 컨트롤할 편집부가 따로 있는게 아니라면. 그리고 내용이 기승전결 있는 극화라면 이게 대략 몇 화짜리인지. 가능하면 시놉시스 외에 트리트먼트를 받는 것도 방법입니다. 트리트먼트는 각 화별로 나눈 시놉시스예요. 청사진 같은 겁니다. 한 화당 원고지 1쪽 내외로 정리할 수 있으면 됩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 저는 펌잇이라는 4컷만화와 리베르떼라는 극화를 쓰고 있어요. 펌잇은 캐릭터물이고, 4컷만화죠. 그래서 언제 회사에서 그만하라고 해도 한달만 여유가 있으면 마무리를 지을 수 있도록 밑밥을 깔아놓았어요. 이쪽은 캐릭터만 튼튼해도 굴러갑니다. 저는 이쪽은 글콘티를 쓰고, 컷 재활용을 적극 추천하고, 필요한 패러디나 구도, 각종 자료가 있으면 사진자료나 그림판으로 대충 그린 컷 구도를 넣어서 보내고 있습니다. 4컷만화니까 가능한 일이죠.

20151222콘티샘플

리베르떼는 극화죠. 극화는 전체 시놉시스 안에서 기승전결이 있어야 하는데, 이게 각 화 안에서도 작은 기승전결이 있어야 하고 가급적 클리프행어면 더 좋으며, 단행본으로 묶여 나왔을 때에도 그 안에서 기승전결이 있어야 좋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리, 편집부와 몇화정도 갈 것인지 의논해 두고 시놉시스를 바탕으로 트리트먼트를 만들어 둡니다. 아마도 이 트리트먼트를 보시고, 한 권이 몇 화정도로 묶이는지 예측해 보시면 이 사람이 이걸로 읽을 만한 것을 만들 수 있을지, 이야기를 제대로 굴릴 수는 있을 것인지 감이 올 것입니다. 그림과 스토리가 나뉜 이상 이건 협업이고, 스토리작가는 당연히 협업에 최적화되도록 협력해 줘야죠.

여기까지 괜찮았으면 콘티를 짤 줄 아는지 보세요. 두번 말합니다. 어차피 스토리작가가 콘티와 연출까지 한다 한들, 스토리작가란 자고로 님이 새빠지게 그려야 할 군중씬을 두고 백지 펼침면에다 궁서체로 “군중”이라고만 쓰고 넘길 작자들입니다. 그럼 적어도 나머지는 납득할 수 있어야죠.

뭐 물론 이렇게 말하는 저…..는 소설로 데뷔했는데 갑자기 너 콘티 한번 짜보라고 하셔서 이렇게 되었습니다만. 그리고 그 과정에서 두세달간 꾸준히 혼나고 다시 그리고 그러다보니 졸라맨밖에 못 그리던 사람이 그림이 늘고…..(한숨) 콘티 그려서 보냈더니 “몇페이지 몇번째 컷을 좀 높은데서 바라본 각도로 다시 그려서 보내줘”같은 말이나 듣고 그걸 듣고 또 그리고 있…… 아니 잠깐, 그냥 글로 쓰면 되지 않냐고요. 으아아앗.

여튼 저는 야매로 시작당한 대신 배울 기회가 있었는데. 그렇지 않더라도 연습장 만화 같은 것 그리는 연습이 도움이 되….는 정도가 아니라 그게 콘티짜는 연습이고요. 잘된 것을 공개해 놓으시면 그게 또 포폴이 되는 거고요. 제가 늘 저런 사람과 동시대에 일할 수 있어서 기쁘다고 생각하는 마사토끼님도 그러셨죠! 연습장 만화!!!!! 그리고 완결을 내 본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짧게라도 완결을 내 본 경험이 많은 쪽이 좋아요. 여튼 스토리 작가 하시려는 분도 찾으시는 분도 굿럭♡

가장 좋은 건 뭐, 옆에 그런 걸 할 수 있고 그동안 써 본 연습장 만화도 잔뜩 있는 사람, 가급적이면 소설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짧게라도 연재를 해서 완결을 내 본 경험이 있으며 그 인격도 어느정도 알고 있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만, 이것도 경우에 따라서는 좋은 친구 잃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보니.

ps) 그리고 자칭 업계에서 끗발 날린다는 스토리작가. 에 쫄지 마세요.

그런 분이 몇분이나 될까요? 사장님이나 편집장님 하시는 분들 계시긴 합니다만 그분들은 진짜진짜 세계로 가는 탑이시고요. 아니, 자기 입으로 끗발 날린다고 할 정도면 그정도는 하셔야죠. 그리고 끗발 날린다고 다른 작가의 앞길까지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결정적으로 그렇게 끗발좋은 분이 뭔가 갑자기 쌩신인 앞에 짠 나타나서 나와 손잡고 세계를 제패하지 않을래 하는건 어지간해선 개연성이 글러먹은 일이므로…… 질 봐서 눈앞의 스토리작가가 마음에 안들면 계약하지 마세요. ㅇㅇ 스토리작가와 사이가 틀어진들 그 작가와 틀어지는 거고. 뭐 그가 좀 치사한 자라면 그와 친분있는 자들과도 틀어질 수 있겠지만 세상은 넓고 스토리작가는 많아요. ㅇㅇ

그리고 결정적으로 스토리작가야 말로 그림 없이는 작품을 완성 할 수가 없음.

진짜로 그렇죠. 아무리 슈퍼슈퍼 우주대존잘이라도 콘티만으로 작품으로 불리는 건…… 뭐 사실 그래서 저는….. 스토리는 내 자캐가 동업존잘님의 손으로 아름답게 뽑혀 나오는 걸 보는 기쁨이 있고 소설은 혼자 뽑아내는 즐거움이 있습니다만 여튼 그렇다고요. 그러니 자신감 갖고 좋은 스토리작가 만나세요.

특히 먼저 자기가 업계의 선배인 척 하면서 집적거리고 추근거리고 성희롱하는 자들 치고 제대로 된 인간은 단 한톨도 없습니다. 기뻐하세요. 고민할 필요도 없습니다. 한 톨도 한 마리도 한 낱도 없으니까 그냥 무시하세요. 십년쯤 전에, 저는 만화는 아니고 장르쪽에서 자칭 업계의 선배라는 분이 집적거리고 추근거리고 새벽에 여자 소개해달라, 섹스하고싶다, 술마시자, 모텔 갈 생각 없느냐 등등의 헛소리를 하셨는데요.

그새끼 지금 어디서 뭐 하는지 흔적도 안 보이네요.

그리고 전 잘 살아남아서 아직도 그새끼의 당시의 필명을 언급하며 두고두고 가루가 되게 까주고 있어요. 혹시라도 먼저 업계의 선배랍시고 집적거리는 놈팽이가 있으면, 그냥 찌질한 인간이구나 생각하고 잊어버리세요. 요즘 SNS에 작가님들 많이 계십니다. 이상한 계약이 있으면 물어라도 보세요. 그게 쑥스러우면 관련 카페에라도 가입해서 물어보세요. 만약에 성희롱 등을 당한다면 가급적 녹음하고 협회나 관련 카페의 도움을 받으세요. 괜찮습니다. 그런 놈과 웬수가 되더라도 님은 얼마든지 살아남을 수 있어요. 정말입니다.

ps2) 뭐 썰을 풀었습니다만 저는 만화 스토리작가 쪽으로서의 일도 참 좋아합니다. 심지어는 글씨를 휘갈겨 썼다고 빠꾸먹은 일도 한두 번은 아닙니다만, 고생하는 보람이 있어요. 다행히도 같이 일하신 그림작가님들 다들 좋은 분들이셨고. 제가 만들어난 안경미남 자캐들이 지면에 나올 때 마다 좋아서 호흡이 탁탁 막히며 스토리 쓰기 잘했다고 혼자 기뻐하거든요. 아아, 이 욕망에 충실한 인생같으니.

우당탕탕 야옹이 시리즈 – 빵 공장이 들썩들썩 / 기차가 덜컹덜컹 – 구도 노리코, 윤수정, 책읽는곰

빵 공장이 들썩들썩10점
구도 노리코 글.그림, 윤수정 옮김/책읽는곰

우당탕탕 야옹이 시리즈는 트위터에서 한두 컷이 올라온 것을 보고, 굉장히 귀엽다고 생각했던 책이다. 올해의 마지막 책 주문에 끼워넣어 함께 구입했다. (그러나 SF판타지도서관 관장님의 신간이 이번주에 나온다고 하니, 아마도 맹세를 어기고 또 지르게 될 것 같다. 내가 그렇지 뭐. 크리스마스 지나기 전까지는 방심할 수 없습니다.) SNS에서 봤던 이미지 이상으로 귀엽고, 소리내서 읽으면 특히 귀엽다. 예를 들면 달밤에 야옹이들이 멍멍씨네 빵 공장에 숨어드는 장면만 해도 그렇다. 어두운 달밤에 빵공장이 있고, 야옹이들의 그림자가 지나가는데 대사는 딱 두줄이다.

부엉부엉
야옹

대사는 의외로 짧고 입말로 읽기에 재미있는 반면, 그림에는 상당히 정보량이 많다. 야옹이들이 빵 공장을 엿보는 장면만 해도 그렇다. 얼마나 많은 종류의 빵들이 저마다 이름표를 달고 늘어서 있는지. 그런데다 연출은 상당히 만화적이다. 동시에 여러 사건이 일어나는 페이지는 위아래로 컷이 나뉘어 있다. 두 페이지에 걸쳐 네 컷이 나오고 야옹이들이 수선을 피우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리고 폭발 장면은 그야말로 만화의 문법이 그대로 그림책에 들어온 느낌이다.

야옹이들은 떼로 움직이지 개체 차를 보이진 않는다. 야옹이들의 장난에 시달리는 멍멍씨와 그 장난이 빚어내는 사고의 패턴도 1권과 2권이 동일하다. 이게 한 2, 30권 반복되면 지루할 수도 있겠지만, 어린아이들의 그림책으로는 이런 예측가능한 부분이 또 좋다는 생각이 든다. 두 권을 동시에 읽었을 때의 느낌은 마치 4컷만화를 보고 난 것 같았다. 집에 아기가 없더라도 귀여운 걸 좋아하면 장만할 만 하겠다. 일단 이 책은 우리 집 꼬꼬마에게는 한참 이른 관계로 나 혼자 읽고 즐거워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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